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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스 Sep 29. 2023

#1: 로마 가는 길

    첫 배낭여행 행선지를 이집트로 잡자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 누군가가 '처음부터 이집트를 가면 그다음에 볼 게 없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 말에 짧게나마 이집트 여행 전에 로마와 아테네 일정을 끼워 넣었다. 혼자 가는 첫 해외여행이었어서 비행기 표 끊는 일도 생소했다. 마침 운 좋게 해외 대형 항공사가 인천공항 첫 취항 행사로 유럽행 비행기표를 싸게 내놓았고 운 좋게 로마 IN - 카이로 OUT 비행기 표를 저렴하게 끊었다. 다만 로마-아테네, 아테네-카이로 비행기 값이 걱정이었다. 인터넷을 뒤져봐도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감당이 안 되는 가격이었다. 계속 찾았다. 결국 지중해 지역만 운영하는 것 같은 저가항공사를 하나 찾게 되었고, 아주 저렴한 비행기표를 끊어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첫 여행이라 그렇게까지 열심히 찾아내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장시간을 홀로 비행하는 일마저도 당시에는 특별하게 느껴졌다. 장시간 비행 자체도 거의 10여 년 만이었다. 두바이 공항을 경유하는 경로였다. 첫 여행인지라 경유 대기 시간조차도 즐겁고 신기했다. 경유도 처음 해 보았기 때문에 길을 잘못 들어서 엉뚱한 비행기를 타거나 비행기를 놓치면 어쩌나 하는,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법한 걱정도 하지 않았을까.

    두바이 공항은 화려했다. 거의 모든 기둥들이 야자수 모양이었고 인천공항만큼이나 깔끔했다. 군데군데 나와 같은 배낭 여행객들이 몇십 리터나 되는 배낭을 베개 삼아, 등받이 삼아 시간을 보냈다. 나도 공항을 대충 한 바퀴 둘러보고는 출발 게이트 근처 의자에 배낭을 내려놓고 무언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MP3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거나 챙겨갔던 책을 읽지 않았을까 싶다.

    첫 여행이라 배낭이 가득했다. 걱정이 많았던 부모님께서 챙겨주신 상비약이나 모기향도 있었고 지금 생각하면 왜 챙겼는지 모를 참치 통조림 같은 것도 몇 개 배낭에 넣었던 것 같다. 안 그래도 무거운 배낭에 책도 한 서너 권 챙겼다. 아마 MP3 플레이어가 대중화되기 전이었다면 CD도 적어도 열 장은 챙겼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 이유 없이 떠난 여행은 아니었다. 이십 대 초반을 지나던 당시 어느 날 스스로를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내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닌 것만 같았다. 스스로를 스스로 안에 가둬놓고 억누르는 느낌도 들었다. 군대 문제도 물론 한몫을 했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집안 형편은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대학을 다니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해외여행이란 아무리 저렴하게 간다고 해도 사치였다. 하지만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죄송스러움을 무릅쓰고라도 이 시기에 어떻게든 나가보아야 한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후회가 될 것 같았다. 그때까지 꾸준히 장학금을 받아서 보조를 해드렸으니(물론 이는 말도 안 되는 핑계다) 이 정도는 말을 꺼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철없는 생각도 했다.

    기억이 희미하다. 내가 그렇게 심적으로 방황하고 있으니 부모님께서 먼저 손을 내미셨었는지, 아니면 내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어딘가 한 번 떠나고 싶다고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무튼 어찌어찌해서 내가 통장 잔고로 가지고 있던 극히 얼마 안 되는 돈과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돈을 합하여 이백만 원이 조금 안 되는 돈이 마련이 되었던 것 같다.

    여행 기간은 6월 21일부터 7월 15일까지 거의 한 달 일정이었다(여권기록을 뒤져보았다). 항공비는 특가 비행기표로 유류할증료 포함 80만 원 정도에, 로마-아테네, 아테네-카이로 비행기표가 다 해서 20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는 돈은 백만 원 즈음이었다. 25일 일정에 하루 4만 원도 안 되는 예산은 당시 기준으로도 보통의 경우라면 무리였다. 하지만 당시 나는 넉넉하다고 느꼈다. 로마와 아테네 일정은 합쳐서 일주일이었다. 나머지 18일은 이집트 일정이었고, 이집트는 물가가 말도 못 하게 낮았다. 이런저런 계산을 해 본 결과 백만 원은 당시 나에게는 넉넉한 예산이었다. 심지어는 그 돈을 다 쓸 생각도 추호도 없었다. 비상사태를 포함하더라도 나에게는 여유로운 예산이었다. 제대로 갖추어진 식당에서 식사를 할 생각도 없었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쇼핑에는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걷고, 유적지를 구경하고, 사람들을 구경하고, 박물관을 다니고, 미술관을 다니면 되는 여행이었다. 하루 세끼를 길거리 음식이나 동네 구멍가게에서 빵을 사다 먹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기에 나에게 그 돈은 매우 넉넉했다.

    이집트는 여러모로 나에게 완벽한 행선지였다. 당시 크리스티앙 자크가 쓴 소설 '람세스'에 빠져있었기도 했지만 이집트는 언제나 나에게는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카메라로는 담지 못할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확신도 들었고, 그곳의 유적지들이 나에게 변화의 계기를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컸다. 그리고, 물가가 싸다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하루 숙박비를 만 원을 잡아도 넉넉했다. 카이로를 벗어나면 하루 오천 원, 삼천 원 숙소도 허다했다. 보고 싶은 유적들이 지천으로 깔린 데다 물가까지 저렴하니 나에게 이보다 더 완벽한 행선지는 없었다. 로마, 아테네 일주일만 어떻게든 버텨내면 그다음부터는 전혀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일말의 두려움이 없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처음으로 홀로 해외에 나가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영어 실력도 완성되지 않았을 때였다. 필요한 말 정도만 딱 구사할 수 있는 정도였고, 유럽에서는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기에 이러이러한 상황이 생기면 어떡하나 싶기도 했다. 로마에는 소매치기가 많다고 들어서 그 점도 조심스러웠다. 당시는 지금처럼 카드 한 장이면 어디서나 편하게 돈을 뽑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고 지금처럼 신용카드 한 장 들고 긁고 다니면 되는 시대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걸 어떻게 쓰고 다녔지 싶은 여행자수표를 만들어서 다녔던 시절이었다. 즉, 다 현금 및 현금등가물이었다. 운이 나빠서 소매치기라도 당하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부모님께서 비상시에 쓰라고 신용카드 한 장을 조심스레 주셔서 받아오긴 했지만 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실제로도 여행이 끝날 때까지 그 신용카드는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상상이지만, 아마도 로마로 가는 연결선을 기다리면서 위와 같은 생각들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에서 떠날 때에는 걱정 따위는 하지 말라며 자신만만했지만 자그마한 두려움이나 불안함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 두바이 공항에서 나는 아마도 음악을 듣다가도 어느덧 떠오른 긴장감 때문에 론리 플래닛과 한국에서 미리 프린트 해 온 인쇄물을 보면서 로마 공항 시내까지는 어떻게 가는지, 떼르미니 광장에서 숙소까지 어떻게 가는지를 보고 또 보지 않았을까 싶다. 로마 말고는 숙소 예약도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테네, 카이로 공항에 내려서 론리플래닛 숙소 정보란을 보고 전화를 걸어서 숙소를 잡아야 했다. 게다가 아테네에는 새벽 두 시인가 세 시인가에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지금생각하면 참 무모했다. 그때에는 그저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실제로도 그랬다.

    이것이 연결 비행기를 기다리는 도중의 내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가 어딘가에서 탑승 안내 방송이 들려왔을 것이고, 나는 펼쳐두었던 것들을 추려서 다시 배낭에 넣고, 10kg는 족히 넘었던 그 배낭을 들고 로마로 가는 그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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