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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스 Oct 23. 2023

#5: 아테네(1)

공항, 새벽, 그리고 숙소

    로마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아테네 공항에 새벽에 착륙했다. 새벽 두 시 정도였던 것 같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새벽 공항은 황량했다. 원래는 공항에서 짧게 잠을 자고 해가 뜰 무렵에 움직이려고 마음을 먹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가 나는 그럴 수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었다. 공중전화를 찾아 미리 알아 둔 숙소 몇 군데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일단 어떻게든 시내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버스 정거장으로 갔다. 몇 번 버스를 타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지도 못했다. 그 시간에 운영을 하는 버스가 있는지도 불확실했다. 물어 볼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초조해하던 와중에 버스 한 대가 기적같이 와서 정거장에 섰다. 운전사에게 '시티 센터'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간다고 한다. 일단 무작정 타고 요금을 지불했다. 버스 기사는 나와 같은 배낭 여행객을 많이 본 듯했다. 늘상 일어나는 일이라는 듯 버스 기사는 익숙한 몸짓으로 버스 문을 닫고 핸들을 돌리며 운전을 했다.

    버스는 얼마간을 달렸다. 공항을 막 벗어났을 때에는 도로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전 세계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도로였다. 같은 풍경이 계속 되자 이 버스가 과연 아테네 도심으로 가는 버스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선택지는 없었다. 버스 기사는 그 버스가 아테네 도심으로 간다고 했고, 그렇다면 가는 것이다.

    그렇게 버스는 얼마간을 더 달렸다. 드디어 저 멀리 쌀알처럼 밀집된 전깃불이 보였다. 아마도 아테네일 그 도시는 새벽에도 마냥 어둡지만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지워지기 시작했다. 버스가 앞으로 갈 수록 불빛은 더 커졌다. 이윽고 아테네가 확실해보이는 도시가 본격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당시 나는 오래 된 무언가를 신비롭게 여겼다. 아테네는 로마보다 역사가 깊은 도시이고, 따라서 로마보다 더 동경의 대상이었다. 무얼 제대로 알고 한 동경은 아니었다. 막연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막연한 동경이었다. 온갖 그리스 신화와 고사와 문학과 정치사가 뿌옇게 머리를 채웠다.

    어두운 새벽에도 아크로폴리스는 밝게 빛났다. 그 정상에는 파르테논 신전임이 분명해보이는 신전 건축물도 보였다. 도시 한 가운데에 솟은 아크로폴리스와 그 정상을 누르는 신전의 모습은 눈으로 직접 보아도 비현실적이었다. 아크로폴리스를 처음 보았을 때만큼은 내가 지금 어떻게는 숙소를 구해야하는 절박한 상황이며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대책없는 상황이라는 사실도 잊었다.

    아크로폴리스에 정신이 팔려있는 나에게 버스기사가 손짓을 했다. 이 곳이 '시티 센터'라는 뜻으로 보였다. 나도 기사에게 고맙다는 몸짓을 하고는 거대한 배낭을 들쳐메고 버스에서 내렸다.

    내린 곳은 거대한 회전교차로였다. 교차로 중앙은 분수대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수대에서 그 시간에도 물이 뿜어져 나왔던 것 같다. 화려한 느낌이었다. 차는 거의 다니지 않았다.

    그곳은 정말로 '시티 센터'였던 모양인지, 길가 호텔들은 모두 심하게 비싸보였다. 깊은 새벽 시간이었기에 리셉션 데스크가 닫힌 숙소도 많았다. 일단 길가 호텔 한두군데를 들러봤던 것 같다. 그리고는 너무 비싼 가격 때문에 다시 거리로 나왔던 것 같다.

    후미진 골목을 어떻게 찾아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시간에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무작정 도심으로 나오는 무모한 결정을 내린 스스로를 험담하면서 한참을 걸었던 생각은 난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도 아직 깊은 새벽이었을 정도로 난감한 시간에 나는 아테네에 당도했던 것이다. 끝나지 않는 새벽을 걷고 또 걷다가 허름해보이는 숙소를 하나 발견했다. 숙박비도 어렴풋하게 기억이 난다. 30유로 정도였다. 주인인지 직원인지 모를 푸짐한 인상의 아주머니에게 열쇠를 건네받고 삐걱거리는 계단, 혹은 덜컹거리는 엘레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향했다.

    아주 좁은 갈색 분위기의 방이었다. 넓이야 어쨌든 상관없었다. 배낭여행객에게 숙소란 어차피 잠을 자기 위한 공간일 뿐이다. 잠을 자고, 몸을 씻을 수만 있으면 된다. 게다가 가격도 30유로밖에 하지 않는 방이다. 넓고 편안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배낭을 대충 던져놓고 일단 몸을 씻으러 샤워실로 들어갔다. 수도관이라기보다는 공장 파이프같은 관이 샤워기와 연결이 되어 있었다. 물을 틀자 거의 공사가 시작되는 듯한, 파이프를 마구 두드려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뜨거운 물이 나왔는지 여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깊은 새벽이었는데도 옆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쨌든 겨우겨우 몸을 씻고 나와서 침대에 누웠는데,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그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이 숙소에서는 절대로 추가적인 숙박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던 것만은 확실히 기억난다. 하지만 그 정확한 이유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에서 지워버릴정도로 충격적인 무언가를 목격했거나 겪었던 것일까.

    해가 충분히 떴을 때까지 그 숙소에서 일단은 버텼다. 애초에 공항에서 밤을 지새고 아침에 버스를 타고 나왔어야 했다. 그 난감한 시간에 공항에서 무조건 아무 버스나 집어 타고 시내로 나온 선택은 매우 잘못되었다. 하지만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체크아웃을 하고 그 충격적인 숙소에서 벗어나서 처음으로 밝은 아테네 거리를 보았다. 내가 새벽에 보았던 그 원형교차로에는 수많은 차들이 오갔고 중앙분수대에서는 하얀 첨탑같은 물줄기들이 뽑아져 올라왔다. 아테네의 색도 기본적으로는 노랑이었지만 로마보다는 흰색이 더 섞인 노랑이었다. 아마도 로마보다는 도시 속 건물이나 도로배치 간격이 여유로워서 그렇게 느끼지 않았나 싶다. 오밀조밀하다기보다는 번듯번듯한 느낌이었다. 도시 자체가 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유가 느껴졌다.

    아테네에서 머무를 시간은 그로부터 2박 3일 정도였다. 즉, 2박을 더 할 숙소를 어서 찾아야 했다. 론리플래닛을 봤었는지 아니면 어떻게든 물어물어 추천을 받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리저리 헤매다가 한 숙소를 찾았다.

    그 전에 묵었던 숙소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깔끔한 하얀 집이었다. 호텔식 숙소이긴 했는데 건물 높이가 4층인가 5층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 중에 남은 방은 맨 위층이었다. 방을 나와서 계단을 조금만 오르면 옥상이었고, 옥상에서는 아크로폴리스가 정면으로 보였다. 반할 수 밖에 없는 전경이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하루에 75유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대학생 배낭여행객이었던 나로서는 숙박비를 하루에 75유로를 쓴다는건 충격적인 일이었기에 그 가격이 아직도 정확히 기억이 난다. 양심이 찔리기도 했다. 그 여행은 온전히 내가 번 돈으로 온 여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몸이 좀 고생하더라도 돈을 아껴야 할 의무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 숙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옥상의 전경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전체 재정상태를 훑어보았다. 다행히 로마에서 나는 생각보다도 상당히 절약을 하면서 다녔다. 그도 그럴 것이 민박집 숙박비를 빼고는 돈이 들 일이 거의 없었다. 밥은 대충 동네 가게에서 산 빵으로 해결했고 다니던 곳은 모두 다 박물관 아니면 미술관이었다. 포로 로마노와 콜로세움과 바티칸에 쓴 입장료와 젤라또를 사먹은 것 말고는 쓴 돈이 없었다. 남은 이집트 일정동안 예상되는 비용을 상당히 넉넉하게 잡아보았다. 아테네에서 2박에 150유로를 써도 계획에는 지장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게 되는 얘기지만 당시에는 정말 그 2박에 150유로를 쓰는 결정을 하기까지는 엄청난 계산과 머뭇거림이 필요했다.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죄인이 된 듯한 기분도 들었다.

    결국 2박에 150유로를 지불하고 아테네에서의 남은 기간 동안 그 숙소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때까지의 삶 중에서는 처음으로 해 본 사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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