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 옥상, 박물관, 산책
지난 글에서 말했듯 내가 사치를 부려 머문 아테네 숙소는 옥상 전경이 빼어났다. 그 숙소에서 머문 3박 4일동안 밤에 숙소에 돌아온 후에는 늘 옥상에 올라가 한참동안 아크로폴리스를 바라보았다.
두 번째 밤이었나 모르겠다. 옥상에 올라보니 이미 다른 사람이 맥주를 마시며 아크로폴리스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리 좁은 옥상은 아니었기에 나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크로폴리스를 감상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여행객들끼리 대화가 더 잘 붙었다. 지금은 혼자 있어도 손에 스마트폰만 쥐어주면 온갖 놀이를 할 수 있기에 예전보다는 여행객들끼리 대화가 덜하다. 스마트폰 안에 지도가 있으니 서로 길을 물어 볼 일도 잘 없다. 스마트폰으로 근거리 광각 셀카가 가능하니 지나가는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할 일도 잘 없다.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런저런 대화가 잘 이루어지곤 했다.
그는 독일에서 왔고 직업은 의사였다. 아마도 첫 마디는 '이 숙소 옥상 경치 정말 좋지 않냐'였지 않을까 싶다. 그 첫 마디를 시작으로 꽤 긴 대화를 나눴었다. 구체적인 내용이야 이제 와서는 모두 잊었지만 당시 학생이었던 나는 은연중에 당시 내가 마음 속에 가졌던 목표를 얘기했었고 그는 나에게 행운을 빌어주면서 대화가 마무리되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무슨 목표를 이야기했을까. 그마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목표대로의 삶을 살지 못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당시 목표가 무엇이었던지간에 그 목표는 현실이 되지 못했다. 물론 그 때 나는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리라. 어찌 보면 그것은 목표라기보다는 바람 같은 것이었다. 당시의 현실은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바라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눈 앞에 신들의 장소인 아크로폴리스까지 보이다보니 그 바람은 더욱 더 크지 않았을까.
이집트로 떠나기 하루 전 날에는 일어나자마자 박물관을 돌았다. 나는 지금도 여행을 가서 박물관 다니기를 즐긴다. 박물관은 엄청난 물건들이 모인 공간임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여행객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기에 다니기가 편하기도 하고 혼자서 생각에 빠지기에도 좋은 장소이다. 물론 고고학 공부를 하러 박물관에 가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박물관에 전시된 오래된 유물들이 역사적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유물들은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수수께끼이다. 오래 된 것일수록 그렇다. 박물관을 다니다 보면 내가 배운 세계사나 인류사가 과연 맞는 것인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배운 지식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유물들이 도처에서 불쑥불쑥 나타나기 때문이다. 오래 된 조각만 보아도 그렇다. 그런 형상들을 어떻게 상상해 내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우리는 그저 추측을 할 뿐이라는 생각이 박물관들 돌 때마다 매번 든다.
한 사설 박물관에도 들렀다. 어느 부유한 개인이 자신이 소장한 물건들을 전시한 곳이었다. 개인 소장품들은 공립 박물관 전시물과는 느낌이 또 다르다. 공식적인 중요도야 공립 박물관에 소장된 물건들이 평균적으로 더 높겠지만 사설 박물관은 일관된 취향에 따라 선별된 데에서 오는 특이성이 느껴진다. 여기에 '이런 물건을 개인이 소장하다니'하는 재미는 덤이다.
박물관을 돌다 보면 '현 시대 사람들이 과연 옛날 사람들보다 더 명석한가'에 대한 의문이 들 때가 많다. 물론 현 시대는 기원전 시대 사람들이 만들지 못했던 수많은 물건들을 만든다. 인류는 모든 동물 중 유일하게 지식을 기록으로 남겨서 후대에 전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선대가 수십, 수백 년에 걸쳐 쌓고 밝혀낸 지식을 후대는 몇 시간, 혹은 몇 년만에 배우게 되고 그 위에 또 다른 지식을 쌓아 후대에 물려준다. 그래서 현대 인류는 과거 인류보다 발전된 기술을 획득했고 그 기술을 바탕으로 발달된 물건을 만들어낸다. 이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현재 인류가 과거 인류보다 지능 자체가 뛰어나다는 증거가 될까? 여러 곳을 다니면 다닐수록, 여러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렇지는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현대인은 집중하여 상상하고 연구해내는 자세를 유지하는 능력을 많이 잃었다. 그저 더 나은 도구를 사용할 뿐이라는 생각이 자주 들곤 한다.
박물관을 나와 내일이면 떠날 아테네 여기저기를 산책했다. 꽤나 늦은 시간이었지만 아직 밝았다. 아테네는 여름에는 해가 밤 9시에 진다. 밤 9시까지 환하다는 얘기다. 여행을 하는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편하게 다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기 때문이다.
도시는 변하기도 하고 변하지 않기도 한다. 박물관에서 수천년 전 물건을 본 후 현대의 거리로 나와 산책을 하니 그것이 더 명확하게 느껴졌다. 무엇인가는 유지가 된 느낌이 든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무언가 이어져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매력적인 도시들은 이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든 이어진 듯한 분위기를 공통으로 가진다. 부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