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Novellete
1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빔 밴더스(Win Wenders)가 감독했다.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이 영화를 누군가에게 그냥 보여줬을 때, 감독이 독일인일거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을까? 다른 문화권에 대한 영화를 연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이렇게 완벽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어내다니, 그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싶었다.
"잘 보면 빔 밴더스 스타일이 보여."
라고 그가 감독한 영화를 거의 다 섭렵한 형이 말했다.
"그럼 형은 영화만 보고 감독을 맞출 수 있겠어?"
"물론 그건 힘들지."
그가 본 빔 밴더스 영상들은 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 두 편이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과 '피나'. 웬만한 영화들은 이미 꽤나 감상한 그였지만 '파리, 텍사스'나 '베를린 천사의 시' 같은 작품도 보지 못했다. 봐야 하는데 아직 보지 못한 영화들은 늘 많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도 독일 문화권 다큐멘터리가 아니었다. 빔 밴더스 감독은 다른 문화권에 침투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나보다.
이 영화를 두 번째 보고 나왔을 때, 그는 영화에 드러나지 않은 히라야마 이야기가 생각보다도 많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주인공 말이야, 왠지 과거에 결혼도 했었고 아이도 있었던게 아닐까?" 라고 그는 친구에게 물었다.
"너무 멀리 간 것 아냐?"
"같이 화장실 청소하던 젊은 애가 히라야마한테 '그 나이에 결혼도 안 하고 그러고 있으면 외롭지 않냐'고 물었는데, 그 때 표정이 묘했어. 동생이 히라야마한테 '아버지도 예전같이 그렇게 심하게 말하진 않을 테니 한 번 뵙는게 어떠냐'라고 말했을 때도 뭔가 이상했던단말이야."
"뭐, 그랬을 수도 있겠네." 친구는 별 관심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생각해 봐. 늘 가던 술집 있잖아. 어느날 그 술집 주인의 전 남편이 갑자기 찾아온 걸 목격하고는 주인공이 엄청 놀라잖아. 히라야마가 그 술집 사장에게 이성적으로 관심이 있다든가 해 보이진 않았거든.?근데 또 엄청 놀라. 히라야마도 과거에 비슷한 경험을 한 게 아닐까?"
"또 멀리 간다, 또."
"그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이야기 연결이 잘 안 되는거 같아."
진실은 감독만이 알겠지만 주인공이 지닌 사연이 보통이 아님은 분명해보였다.
2
매일같이 같은 장소로 출근을 하고, 업무 시간에 비슷한 일을 하고, 매일 같은 시간에 퇴근을 하는 그에게 '퍼펙트 데이즈'는 여운이 긴 영화였다. 반복적인 삶이라는 외형은 주인공이 사는 삶과 비슷했지만 영화 속 주인공과는 달리 그는 하루하루가 보람되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 집을 나설 때마다 기분 좋은 웃음을 짓지도 못했고, 하루 중 어느 순간순간을 아름답고 소중하게 여기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히라야마는 실내가 아닌 많이 돌아다녀야 하는 야외 일을 택했을까?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는 우연한 무언가를 마주할 일이 없잖아.'
그렇다고 히라야마가 하는 일을 따라서 시작해보고 싶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히라야마가 사는 그토록 무욕적인 삶은 그와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만 가능할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히라야마가 사는 삶이 딱히 좋은 삶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저 어떤 인물이 사는 어떠한 삶을 그렸을 뿐이다. 그것은 영화로 남겨도 좋을 만큼 고유했고 그 고유한 삶은 관객인 그에게 독특한 감동을 주었다.
3
'퍼펙트 데이즈'에는 책이 세 권 등장한다.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 종려나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11', 고다 아야의 '나무'. 셋 모두 그는 읽어보지 못한 책들이었다. 영화 감독이 작품에 책을 분명하게 등장시켰다는 것은 그 책들이 시간상 영화가 표현하지 못한 무언가를 가졌음을 뜻한다. 그는 그 책 세 권을 사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형 서점 사이트에 들어가 찾아보니 '야생 종려나무' 번역본은 너무도 오래된 판본이라 사실상 절판되었다고 봐야 했고, '11'은 아예 번역이 되지 않았다. '나무' 번역본은 절판이었다. '야생 종려나무'와 '11'은 원서를 구입해서 읽으면 될 일이지만 일본어를 잘 하지는 못하는 그로서는 '나무'가 문제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빔 밴더스 감독도 그 책을 일본어로 읽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영역본은 유통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4
"음악을 정말 잘 썼더라구요"라고 그는 음악 공간을 운영하는 형에게 말씀드렸다.
"그래? 뭘 썼는데?"
"처음에는 애니멀즈의 '하우스 오브 더 라이징 선'을 틀더라구요."
"일본이 배경이니 그 곡을 썼겠네. 그건 서양 감독 답기도 하군."
"네. 원곡은 뉴 올리언즈 배경이지만 서양 사람들에게는 일본이 '해가 뜨는 나라' 이미지니깐요. 게다가 영화에 노출시켰던 가사가 'my mother was a tailor / she sewed my new blue jeans / my father was a gambling man / down in new orleans'였어요. 주인공이 지닌 복잡한 사연을 암시하는것도 같더라구요."
"재밌네. 제목이 '퍼펙트 데이즈'니 루 리드의 '퍼펙트 데이'도 나왔니?"
"아, 네. 물론이죠. 제 기억에는 그 곡은 주인공이 꽤나 달콤한 경험을 한 날에 나왔어요. 아시겠지만, 그 곡 제목은 '퍼펙트 데이즈'가 아니라 '퍼펙트 데이'잖아요. 퍼펙트한 나날들이 아니라 퍼펙트한 어떤 하루. 그런 생각을 하고 들으니 참 또 절묘하더라구요."
"마지막 곡은 뭐였어?"
"그것도 참 감탄스러운게, 니나 시몬의 '필링 굳'이었어요."
형은 잠깐 생각에 잠기시더니, 고개를 깊게 끄덕이셨다.
니나 시몬이 부른 'Feeling Good'은 단순히 '좋은 기분'을 뜻하는 곡이 아니다. 가사를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희망찬 하루를 뜻하는 곡이 맞지만 전반적인 곡 분위기는 꽤나 심각하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곡에서 가사 딱 한 소절을 뽑는다면 그것은,
Freedom is mine and I know how I feel
이었다.
니나 시몬은 흑인이었고, 그녀는 이 노래를 1965년에 발매했다. 1960년대 미국은 흑인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니나 시몬은 인권 운동가로서도 활동했다. 그러니 이 곡은 억압받는 힘든 나날 속에서도 자유로워보이는 새, 자유로이 흐르는 강, 막힘없이 흐르는 바람 등에게 말을 걸며 'feeling good'을 얘기하는 역설적인 곡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그는 이 곡 도입부에서 장엄한 행진곡, 혹은 장송곡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이 마지막 곡을 들으며 주인공 히라야마는 언제나처럼 운전대를 잡고 출근을 한다. 표정 하나만으로 그 길지 않은 장면 속에서 희노애락을 모두 표현해내는 야쿠쇼 코지의 연기력은 경이롭다. 그의 표정 연기 안에 모든 것이 담겼다. 자유로운 듯, 자유롭지 않은. 과거에 속박되어있지만, 그 속박을 벗어던지려 애쓰는.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은 완벽한 끝곡이었다.
5
코모레비(木漏れ日; こもれび).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나온 사람이라면 하나같이 기억하는 단어이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완벽히 같은 장면이 반복되기란 불가능한 코모레비. 주인공 히라야마는 늘 같은 자리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그리고 코모레비를 볼 때마다 사진을 찍는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이지만 같은 사진은 한 장도 없다. 그는 코모레비가 찍힌 사진은 보관하고, 그렇지 않은 사진은 찢어서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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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Perfect Days
개봉: 2023년
감독: Wim Wenders
각본: Wim Wenders, 高崎卓馬(Takuma Takasaki)
촬영: Franz Lusti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