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Novellete
1
'화양연화'를 언제 처음 봤더라. 그는 기억해내지 못했다. 대학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그보다 좀 더 지나서였을까. 그 때가 언제였든 당시에 그는 이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 영화에 이해라는 단어가 어울리기나 할까. 잘 다가오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 후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렇게 한동안 '화양연화'는 한 번 봤던 영화인 채로 점점 흐릿해져갔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흐르고 그가 영화라는 장르에 점점 더 깊게 빠져들기 시작할수록, 감상한 영화 편 수가 빠르게 늘어갈수록, 영화에 대한 관념과 개념도 바뀌어갔고, 그럴수록 이따금씩 '화양연화'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불현듯 떠오르곤 했다.
2
그녀는 '화양연화'가 그녀가 본 영화들 가운데 최고라고 했다. 그는 기억 저 깊숙한 곳을 두 손으로 파헤쳐 애써 그 영화를 끄집어내어보았다. 봤었던 영화라는 기억과, 어두운듯하지만 분명하고 강렬한 색채감, 한 번 들으면 그대로 머릿속에 박혀버리는 음악. 그리고 왠지 모르게 이따금씩 떠오르던 몇 장면들. 그 정도가 떠오를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난 잘 모르겠던데'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면이 그렇게 좋았어?"
그가 던진 질문에 그녀는 가볍게 놀란 표정을 짓더니 잠시 고민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
"어떤 생각?"
"왜 좋은가 하는 그런 생각."
"그렇게 좋아하는데도 이유는 모르겠다고?"
그녀는 다시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러게.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네. 근데 정말 그래. 그냥 너무 좋아."
3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화양연화'가 다시 극장에 걸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4K 리마스터링 판본이라는 정보도 들렸다. 가서 볼 수밖에 없었다.
영화 시작 전에 왕가위 감독이 화면에 나왔다. 4K 리마스터링판 개봉에 대한 감사 인사 영상이라고 했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명 그는 이 영화에 담긴 비밀을 공유하게 되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비밀이라고?
'화양연화'는 물론 비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이 이를 분명하게 암시한다. 벽에 난 구멍 안에 비밀을 말하고, 그 구멍을 흙으로 막는다. 그러면 그 비밀은 영원한 비밀이 된다.
그가 느끼기에 왕가위 감독이 영화 시작 전에 언급한 비밀은 영화가 분명하게 보여주는 비밀보다 더 깊숙한 비밀이었다. 그는 왕가위 감독이 말한 비밀은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비밀이라고 확신했다.
영화가 시작되었고, 오래 전에 이 영화를 봤던 기억이 머릿속에서 같이 살아났다. 그 기억과 함께 그는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비밀에 초점을 맞추어 영화를 감상했다.
4
그는 영화가 말해주지 않는 비밀을 이제 알게 되었다고 느꼈다. '화양연화'는 마법적이고 비밀스러운 영화였다. 마치 왕가위 감독과 둘이서만 깊은 비밀을 공유한 듯한 느낌이었다. 이 얘기를 왕가위 감독에게 말한다면 감독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면서 웃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확신했다. '화양연화'는 영화 표면적 비밀 외에도 감독 개인의, 혹은 감독의 비밀스러운 상상을 아름답게 감춰낸 영화였다.
'화양연화'는 드라마처럼 보이는 판타지였다. 영화 속 어떤 장면도 실제와는 완전히 다를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영화에 대고 '실제' 운운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언어로는 그렇게 표현을 할 수밖에 없다.
'화양연화'는 왕가위 감독이 무언가를 아름답게 지켜내고자 최선을 다 한 영화였다. 실제 일어났을지도 모를 동물적이며 본능적이고 소란스러울 사건들과 행위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피해가 갈 만한 사건들은 모두 배제하고, 아름다움만을 섬세하게 발라내어 엮어낸 영화였다. 이 인위적인 작업이 이토록 경이롭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왕가위 감독이 그 작업을 온 마음을 다 바쳐 진심으로 수행했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에 담지 않고 잘라낸 비밀들은 결국 그렇게 나무에 파인 구멍 속에 갇혀 아무도 듣지 못하게 되었고, 그 구멍은 흙으로 단단히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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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花樣年華
개봉: 2000년
감독: 王家衛
각본: 王家衛
촬영: Christopher Doyle, Mark Lee Ping-B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