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스 Sep 05. 2024

드라이브 마이 카(2021)

A Novellete

1  

    "다섯 번을 봤다구요?"

    '드라이브 마이 카'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매번 받는 질문다. 그러면 나도 매번 숫자를 다시 세어보게 된다. 다섯 번이 맞나? 아마도 더 되는 것 같다.

    한 영화를 다섯 번 보는 일은 흔치 않다. 훌륭한 영화라고 해서 모두 다 다섯 번씩 보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가 딱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야 가능한 일이다. 예전 한 때에는 '레옹'을 보고 또 봤었다. "삶은 늘 이렇게 힘든건가요, 아니면 어렸을 때에만 그런건가요?Is life always this hard, or is it just when you're a kid?" "늘 그렇지Always like this." 나는 이 대사에 사로잡혔다.

    "다섯 번이... 더 되는 것 같네요."

    "이유가 뭐예요?"

    이유라. 이유는 많았다. 다만 말로 한 번에 정리가 되지 않는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그냥 모든게 감탄스러웠어요." 고민 끝에 나온 대답 치고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뭐가요?" 그녀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저 예의상 묻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하고 싶었다. 언어란 완전할 수 없지만 불완전하다고해서 무시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 보신거죠?"

    "저도 보기는 봤는데..." 그녀는 쑥스러운듯 웃었다. "솔직히 저는 좀 많이 졸았어요. 영화가 너무 길기도 하고 이해가 잘 안 되더라구요. 그런데 그걸 다섯 번도 넘게 보셨다니 이유가 너무 궁금해요."

    이해가 된다. 나도 한 번인가 두 번 정도, 몸이 피곤한 상태에서 봤을 때에는 잠깐씩 졸기도 했었다. 체력이 상당히 필요한 영화이기는 하다. 아니면 굳이 이해하고 싶었던 걸까.

    "제 기준으로는, 우선 각본이 너무나도 뛰어나다고 느꼈어요."

    "어떤 점이요?"

    "영화의 주요 줄거리와 희곡 연출을 병치하여 이끌어가는 방식 자체가 색다르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인물들의 대사와 희곡 대사가 서로 절묘하게 이어져서 아주 묘한 느낌을 만들어내더라구요. 그래서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나서 책을 샀어요."

    "책이요?"

    "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 단편집이요. 찾아보니까 그 단편집이 이 영화의 원작이라고 하더라구요. 보니까 그 단편집 안에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단편소설이 들어가있었어요. 이 영화를 평가하려면 우선 그 책을 읽어봐야했어요."

    "왜였죠?"

    "어디까지가 하루키가 쓴 내용이고 어디서부터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쓴 내용인지를 확인해야했어요. 만약에 희곡 연출을 병치시키는 아이디어도 하루키 책에서 따온 것이라면 감독보다는 하루키의 공이 더 큰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녀는 앞에 놓인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막상 원작을 보니 어쩌면 원작이 하루키 소설이라는 얘기를 안 해도 별 문제가 없겠다 싶더군요. 감독이 하루키 책에서 따온 내용이 몇 가지 보이기는 했지만, 제가 영화를 보며 감탄했던 지점은 모두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쓴 내용이었어요. 하루키도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말을 했더라구요. '어느 부분이 내 소설에서 따온 것인지 모르겠다'라구요. 찬사의 의미로 한 말이었지요."

    "진짜 특이하시네요."

    "늘 이러는건 아닌데, '드라이브 마이 카'가 좀 특이한 케이스긴 했죠. 알고보니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도 헤밍웨이의 단편집에서 이름을 따온거더라구요. 헤밍웨이도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는 단편집을 썼어요. 다만 헤밍웨이의 단편집은 제목 그대로 여성성이 거의 없는 마초적인 단편집이라면,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여자를 잃어버린 남자들 이야기라 색깔이 완전 다르긴 하더군요."

    "저는 전혀 몰랐던 얘기네요. 그럼 영화 한 편 때문에 책을 두 권을 본거예요?"

    "하루키 책은 다 읽었는데, 사실 헤밍웨이 책은 다 보지는 않았어요. 첫 몇 페이지 보니까 어떻게 다른지 느낌이 좀 오더라구요. 헤밍웨이를 좋아하는 편이긴 한데, 그 책은 좀 안 읽히더라구요. 또 모르죠. 언젠가 궁금해져서 다시 읽어볼지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책을 보고 영화를 또 보니까 어떻던가요?"

    "제가 남자인데도 이상하게 여자 입장에서 좀 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여자 입장에서요? 오토(音)가 이해가 되던가요?"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다른 남자들과의 관계를 이어가죠. 남편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심지어는 직접 눈으로 목격을 하고서도 애써 모르는 척 티를 안 내고. 둘 모두 엄청난 비밀들을 숨겨놓고 말로는 하지 않죠. 남자는 잘못이 없지만, 이미 상황은 잘잘못이 문제가 아니게 되어버리죠. 그 상태에서 아내가 용기를 냅니다. 남편에게 오늘 저녁에 들어오면 얘기를 좀 할수 있냐고 하죠. 남편은 감을 잡았으면서도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물론이지'라고 말하고 집을 나섭니다. 그리고는 일부러 집에 좀 더 늦게 들어가죠. 대화 후에 관계가 어떻게 될지 무서워서요. 그런데 집에 와 보니 아내는 죽어있고. 아내도 본인의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사실을 영화가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어요. 오토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까지 외도를 한 거겠죠. 왜 그랬을까. 잘은 모르겠어요. 뭔가 잡힐듯 하면서도 이게 말로 설명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더군요. 그래도 이해를 해 보려는 노력은 하게 되더라구요."

    "노력해도 잘 이해는 안 되던가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생각을 해봤다. 이해해보려 노력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해가 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하시네요. 만약 이해가 된다고 했으면 거짓말이라고 여겼을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죠."


2

    그녀가 떠난 후에도 나는 다시 영화를 생각했다. 생각이 길어지게 만드는 영화다. 많은 것을, 말할 듯 말듯, 알듯 말듯 관객에게 던져준다.

    오토가 관계 후 말로 써내려가는 소설은 생각할수록 의미심장하다. 오토도 자신의 비밀이 밝혀진다면(아마도 남편이 이미 안다고 생각을 하겠지만서도), 그 비밀이 서로 을 통해 드러나게 되었을 경우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가지고 산다. 그러면서도 왜 외도 행위를 중단하지 못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오토가 사망함으로 인해 그 둘은 중요한 무엇에 대해서 결국 서로 대화를 하지 못하게 된다. 카후쿠(家福)는 이제 아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를 영영 알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다룬 영화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을 어떻게 표현을 해 내야 할까, 이것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고민하던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분명 무라카미 하루키의 '남자 없는 여자들'을 읽으면서 스쳐가는 무언가를 잡아냈다. 매우 밝게 빛나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 무엇인가를 그는 움켜쥐고 고민을 했다.

    나는 그 독특한 표현법 때문에 '드라이브 마이 카'가 천재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카후쿠가 본인 스스로의 내면을 진정으로 드러내기 전의 이 영화 속 대사들은 모호하거나, 얇게 떠다닌다. 반면에 카후쿠가 연출하는 희곡은 배우들이 각자 다른 언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가지는 무언가를 분명하게 표현해냈다.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다른 언어를 쓰는 배우들이 상대방이 하는 대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연극적인 무언가는 분명히 전달해내는 영화 속 장면은 마법적이었다. 카후쿠가 연극 준비 연습을 하면서 어느 시점에 배우들에게 '지금 둘 사이에 무언가가 발생되었다'고 말했을 때, 그가 느낀 것이 바로 그 마법적인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감독은 이 병치를 통해 '언어 이상의 무엇이 더 표현을 잘 하기도 한다'는 말을 하려 하지 않았을까.


3

    히로시마(広島)에서 홋카이도(北海道)까지는 먼 길이다. 해협도 하나 건너야 한다. 카후쿠는 자신이 바냐 역을 맡을 수밖에 없는 순간을 맞이했을 때, 운전사인 미사키(みさき)와 홋카이도에 있는 미사키의 고향까지 운전을 해서 가보기로 한다. 그에게는 혼자서 길게 생각을 할 시간이 필요했고, 차 안보다 더 적당한 곳은 없다는게 그 둘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 둘이 히로시마에서 홋카이도까지 운전을 해 가는 과정을 영화는 꽤나 길고도 심도있게 담는다. 나도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카후쿠가 되어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아내로 인해 발생된 감정상태를 잠재우고 다시 바냐 역을 연기하기란 카후쿠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대사 하나하나가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느낌이었을테니까. 오토는 왜 그랬을까, 내가 끝까지 모른 척을 한 것은 잘한 일일까, 그 날 집에 조금 더 일찍 들어갔다면 오토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내 아내는 왜 그랬을까. 왜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그런 행동을 했을까. 아마 그는 이 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던졌지 않았을까.

    중요한 고민거리가 생긴 그 시점에서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운전사에게 당신의 고향까지 차를 타고 가보자, 라고 요청하는 장면은 상식적으로는 어색하다. 하지만 영화상으로는 전혀 이상해보이지 않았다. 영화가 이미 그 둘이 비슷하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영화적으로 충분히 설명을 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둘이 왜 비슷한지 말로 설명해보라고 하면 이는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히 닮았다. 그리고 그 지점을 비유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이 영화 속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다.


4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나온 사람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묻는다면 여러 사람이 체호프의 대사를 유나가 수화로 표현하는 장면을 들지도 모르겠다. 소냐 역을 맡은 유나는 바냐 역을 맡은 카후쿠를 등 뒤에서 감싸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카후쿠의 눈 앞에서 수화를 펼쳐보인다. 소냐가 바냐를 감싸는 듯한 자세로 진심어린 대사를 수화로 표현하는 그 장면은 감동적이다. 바냐도 소냐가 펼치는 수화를 먼 하늘의 별을 보듯 쳐다보며 형언하기 힘든 감동을 느끼는 연기를 펼친다. 그 장면은 바냐에게도 평안을 주지만 카후쿠에게도 평안함을 선사한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에는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겪을법한 갈등과 문제점들이 깊게 흘러간다. 관계가 엉키고, 사고가 발생하고, 오해가 발생하고, 여러 사람이 마음을 다친다. 이 희곡의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가장 강렬하게 던지는 메세지는 잡아낼 수 있다. 그것은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이다.

    심오한 얘기를 현란하게 늘어놓는 작품은 좋은 작품은 될 수 있을지언정 명작, 걸작이라고 하기 힘들다. 이들은 보통 느낌으로만 느껴지는 분명한 무언가를 전달하거나, 단순한 진리가 왜 진리인지를 깊숙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작품들은, 명작들은 작든 크든 관객의 내면을 바꾼다.

    같은 작품을 다섯 번 보는 이유는 스스로는 측정하기도, 알아차리기도 힘들지만 그 작품으로 인해 결코 적지 않은 변화를 겪고,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감독: 濱口竜介

개봉: 2021년

각본: 村上春樹, 濱口竜介, 大江崇允

촬영: 四宮秀俊


작가의 이전글 화양연화(200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