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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잇Eit Sep 14. 2024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님을

사랑하는 존재를 떠나보낼 때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진 전시를 시작하고, 그 중간에 신랑쥐가 한국에 또 잠시 들어왔었다. 소중한 시간을 그와 잘 보내기 위해 그가 한국에 와있는 동안은 그 어떤 약속도 잡지 않았다. 신랑쥐와의 시간에만 집중했다. 신랑쥐와 부산에 내려갔던 지난 8월 말, 엄마가 꾹꾹 눌러왔던 이야기를 내게 전하셨다. 13년을 함께했던 우리 가족 미요가 7월 21일에 세상을 떠났지만, 엄마는 신랑쥐 없이 혼자 지내는 나를 보며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고 하셨다.


차로 이동하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간 부산에 내려올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려오지 않았던 나 자신을 끝없이 탓했다. 배경 사진으로 해둔 미요를 보면서 매일 같이 보고 싶다고 말만 했던 내 자신이 미웠다. 매일 미요와 붙어지냈던 엄마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밀려와서 눈물은 쉴새없이 흘렀다. 집에 도착했을 때 더는 마중하러 나오는 나의 예쁜 하얀 고양이는 없었다. 엄마는 미요의 뼈를 아직 간직해두고 계셨다. 내가 오면 함께 양지바른 곳에 뿌려주겠다고. 미요를 보내주겠다고. 내내 항아리를 미요처럼 곁에 두셨다고 했다. 그날은 미요의 항아리를 곁에 두고 엄마와 함께 잤다.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전날 너무 눈물을 흘렸던 탓이다. 미요를 천천히 보내고 있었을 엄마에게 내 눈물이 또다시 미요를 크게 불러버릴 것만 같아 걱정되었다. 첫날 이후로는 마음을 놓고 울 수 없었다. 엄마도 아빠 곁에서 지내면서 마찬가지였으리라. 아빠라고 마음이 좋을 수가 없었을 테다.


며칠 뒤, 감사하게도 선선했던 어느 저녁에, 엄마에게 미요를 뿌려주자고 했다. 항아리를 열고 미요의 가루를 조심스레 꺼냈다. 미요는 늘 따듯한 햇살이 드는 베란다에서 밖에서 운동하거나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신기하다는 듯 지켜보았다. 난간으로 새가 날아들면 꼬리를 힘차게 양옆으로 치며 잔뜩 까만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미요가 늘 바라보던 그 장소에, 그 날 미요는 우리와 처음으로 내려왔다. 햇살도 들고 또 가끔은 시원하기도 한 대나무 아래에 미요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기약했다. 언니랑 꼭 또다시 가족으로 만나자고.




그렇게 안양집으로 신랑쥐와 다시 올라왔다. 올라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날 밤 햄스터 쿠마도 조용히 잠든 모습으로, 하늘나라로 갔다. 늦은 새벽에 쿠마를 보내주고, 다음날 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부산으로 향했다.


친적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모였다. 할머니께서 가시는 마지막 길에 모두가 자리해서, 내심 할머니께서 뿌듯하시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할머니는 늘 긍정적이었다. 나는 자주 할머니 할아버지께 전화를 드리곤 했다. 그 전화번호가 이 순간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면 내가 그 번호를 그렇게 많이 눌렀나 싶다. 당시 전화기의 각 숫자에서 나던 음계까지 생생하다. 신호음이 그리 오래가지 않고, 꽤나 자주 할머니께서 전화를 받으셨다. "할머니!!!" 하고 소리치면 "채은이~" 하고 불러주시던 할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정월대보름엔 내가 좋아한다고 했던 찹쌀 오곡밥을 항상 보내주셨다. 반찬 투정이 심했던 나는 이상하게도 그 밥과 김치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을 뚝딱하곤 했다. 배가 터지도록 그렇게 저녁을 먹고는 꼭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할머니 찹쌀밥 최고!! 할머니 너무 잘먹었어요!"

"채은이가 찹쌀 오곡밥 좋아해서 할머니가 보냈지요~"

그 찹쌀 오곡밥 맛이 이제 혀끝에서 희미한 걸 보면, 내가 나이를 그만큼 먹었고, 할머니를 떠나보낼 때도 되었다는 것일까.


나의 할머니는 가시는 순간까지도 고왔다. 주무시는 것 같았다.

"할머니...잘가..."

주무시는 듯 보이는 할머니께 전한 마지막 인사였다.


가족들은 모두 함안까지 이동해, 할머니를 할아버지 곁에 모셨다. 마지막으로 간단하게 제를 올리는데, 약간은 선선했어도 그날은 유독 해가 쨍쨍했다. 제를 올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해에 구름이 드리운다. 그렇게 우리가 제를 지내는 내내 구름이 해를 가렸다. 덥지 말라고 할머니께서 손으로 해를 가려주신 것처럼. 누가 부채를 솔솔 부쳐주듯,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도 계속 불어왔다. 제가 끝나고 남은 약과를 두어개 가져왔다. 사촌 지은이와 나눠 먹었다. 할머니가 주시는 음식이라 위안을 얻으며.




떠나보낸다는 것이 막연해 모든 게 두려웠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엄마 아빠를 보내야 한다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 자주 울다 지쳐 잠들기도 했던 겁 많은 아이였다. 사촌들이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기만 해도 그리움에 내리 3일은 밤마다 울었다. 그랬던 나는 지금, 떠나보낸다는 것에 의연해진 성인일까.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내내 내 곁에는 신랑쥐가 함께해주었다. 사하라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분명 피곤했을 텐데, 끝까지 나와 함께해준 그에게 미안했고 크게 감사했다. 이렇게 소중한 이들을 더욱 소중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은, 사실 우리 생이 그리 길지만도 않아서인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한 줌의 뼛가루로 남는다. 무엇을 위해 치열하게 사는지 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랑하고, 행복하고, 건강하자. 소박한 것에 감사하고 작은 행복을 크게 느낄 것.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 다시 만나지 않을까 믿어나본다.

소중한 이들이 또 곁에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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