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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꽃 Sep 19. 2024

어머니들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만원씩 받는 건데 마지막 날이니 오천 원에 드릴게요!"


4개를 산다고 하니 조화를 파는 젊은 친구는 반가운 듯했다. 한 대에 족히 20송이가 넘는 꽃이 달렸고, 화려하고 어여쁘기가 귀신도 홀릴 듯했다. 공원묘지에 접어드는 도로 첫 노점에서 꽃을 샀는데 들어가는 입구에도 노점이 많았다. 울긋불긋 전시된 꽃들은 누굴 반기는 걸까. 하늘은 넓었고 푸른 산세는 아름다웠다. 추석 연휴 5일째에도 여전히 푹푹 찌는 날씨지만 들어가는 차량은 많았다.


산 정상 주차장에서 형님을 만났다. 이렇게 온 지가 몇 년 만이던가. 제대로 앉지 못하는 시모님처럼 어느새 잘 앉지 못하게 된 큰 며느리는 너무나 더워 추모당 홀에 계시고 시숙 어른만 나오셨다. 덥다고 건물 안에 들어가 있으라 했으나 따라나섰다. 시 증조할아버지 할머니와 고모할머니가 계신 곳이다. 운동화를 신고 왔지만 다듬어진 층간 사이를 오르내릴 때는 모처럼 신랑이 손을 잡아줬다.


합장한 증조부모님 산소 양쪽에 흰색과 노란색의 국화를 꽂아드렸다. 4대 위의 어른이니 그 시절의 삶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이런 산에 에어컨을 켜고 차를 타고 올라온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생활이었으리라. 미안함과 고마움이 저절로 올라왔다. 다음 이동한 곳은 신랑의 고모할머니 묘였다. 흰색과 붉은색의 '카라' 꽃을 양쪽에 꽂는 신랑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김복순' 할머니는 돌아가신 시부의 고모님이셨다. 안동김 씨 댁 고명딸로 시집을 갔는데 아이를 낳지 못하자 후처를 들이는 것을 보았고, 그 후처가 자식을 낳자 그 집을 나오셨단다. 그리고는 일본에서 부모를 잃고 돌아온 조카들을 돌보셨다. 시모는 고모님을 시어머니처럼 모셨단다. 손자들을 키워주셨고 막내였던 신랑이 국민학교 6학년까지 소풍을 따라가실 만큼 애지중지해 주셨단다.


그 시절 고생하신 분이 어디 한 두 분이었을까. 내 친정 부모님도 있었다. 맨주먹으로 분가하신 부모님은 외지에서 맨몸으로 가정을 일으켰다. 한 겨울 외풍 드는 방에서 아이들 덮어주고 한쪽 날개는 얼고 살았다는 친정 엄마 말은 부지기수로 굶고 사신 날 만큼이나 서러웠다. 동갑내기 이신 시어머니는 우리 아이 돌 때 사 입힌 외투 품을 넓혀가며 몇 년을 더 입히시는 걸 보았다. 


그런 친정 엄마와 시모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두 분 어머니도 떠올려졌다. 자녀를 키우고 가정을 일으키는데 여성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생하게 느꼈다. 어머니들의 노고가 아니었다면 이 사회가 유지되어 왔을 것인가. 매번 명절마다 지내는 차례를 보면서 웃세대 여성들이 살아온 날에 겸허해진다. 그럼에도 어머니들에게 고마워하고 인정하는 데는 참 인색한 사회다.


힘들었던 어머니들의 삶을 더 고단하게 한 건 여성을 무시하는 사회 통념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백 년 조선의 유교 중 주자학은 여성 천대의 폐습을 남겼고 그 그림자는 결국 남녀 모두를 힘들게 했을 것이다. 어머니들의 희생이 있었다. 그녀들의 대칭점에 있던 남자들에게도 고마움을 느끼지만 솔직히 미안함은 들지 않는다. 그저 어머니와 할머니들에게 먼저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제사가 간단해지고 생략하기도 하는 요즘 그래도 마음에 남는 건 조상들에 대한 추모와 고마움일 것이다. 그 가운데에 약자로 존재했던 분들, 사회의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밑바탕이 되어 준 어머니들을 기억한다. 그녀들의 희생에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그분들의 몫까지 더 잘 살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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