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글제를 왜 알려주지 않을까 했다. 지난달 처음 모임에 가입하고, 내게 글제를 정해보라고 했는데. 그래서 의견도 냈으면서 그걸 깜빡 잊어버리다니. 글제로 '글을 쓰는 이유'를 제안해 놓고, 그 앞에 '내가'를 붙여 공지받았는데도 까맣게 잊고 몇 주를 보냈다. 그렇게나 바쁜 날이 가고 있다. 두 번째로 참석하는 자리, 모두의이야기가 궁금하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생각해 봤다. 글쓰기는 친구다. 내 이야기, 내 말을 어떤 식으로라도 할 수 있다. 어디에서든 어느 때든 펜과 종이만 있으면 펼칠 수 있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엄마를 불러보기도 하고 갈 수 없는 곳을 적어놓고 생각에 잠길 때도 있다. 내 앞에 없는 그 사람이 누구든 불러서 마주 보며 이야기할수 있는 글은 그래서 좋은 벗이다.
무언가가 쓰고 싶어서, 무슨 말인가 하고 싶어서 늘 펜과 공책을 좋아했다. 뭔가를 써야겠는데 그걸 모를 때도 많았다. 그 쓰고 싶어 죽겠는 마음을 안고 종이를 펴면 날짜라도 적었다. 내 이름을 써놓고 앉아 있기도 했다. 필기감이라는 말이 있다. 쓱쓱 그리는 대로 나아가는 느낌이다. 필기감이 좋을 때는 끝도 없이 뭔가 쓰고 싶다.
펜과 종이가 없으면 금단 증상을 느끼기도 했다. 한때 교육에 참석하면 공책을 주거나 펜을 주는 적이 있었다. 어느 해인가 3명이 참석한 교육에서 지인이 공책을 거둬 내게 전해줬다. 자기들은 필요 없다며 주는데마주 보고 웃었다. 그렇게 공책도 펜도 좋았다. 그래도 펴놓고 뭔가를 쓰는 게 눈치 보이던 때였다.
세월이 흐르고 머리색이 희끗해지면서 달라진 일이 있다면, 이제 종이를 펴고 뭔가를 끄적거리는 일이 창피하지 않은 일이다. 쑥스러움이 사라졌다. 어느 때고 그냥 펴놓고 쓴다. 절친이 공식석상에서 '자기만 만나면 종이를 꺼내놓고 대화하는 내용을 다 적는 친구라고' 소개했다. 순간 멋쩍고 미안했지만 그럼에도 십분 이해해 주고 웃으면서 말해주는 모습이 고마웠다. 그도 글쓰기의 맛을 아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말하기와 글쓰기를 같이 여긴 지 오래되었다. 할 말은 넘쳐나는데 누군가 들어주는 이가 없으면 쓰는 것이다. 정감 있게 들어줘야 다정하게 할 말이 많아질 텐데 그런 사람이 드물다 보니 어느 틈에 글 쓰기로 말을 한다. 스스로 터득한 습관 같은 것, 어쩌면 조금은 가련하고 살아가는 요령을 터득한 모습이다. 누구나 가련할 때가 있는 사람이다.
오늘도 빈 종이를 펴놓고 뭔가를 쓴다. 한참을 적다가 깜빡거리는 컴퓨터 화면으로 옮겨올 때는 또 다른 종이에 옮겨 온 듯하여 신나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이 글을 읽어줄 사람, 이 글을 낭독하면 들어줄 사람, 이 글로 인해 가 닿고 싶은 사람, 이 글에서 미처 불러보지 못하고 마음에 남아 있는 사람, 갈 수 없는 먼 거리, 그곳에서 내 글을 봐줄 사람을 생각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언제든 어디서든 어디로든 나를 데려간다. 내가 갈 수 있는 세상으로 인도한다. 세상에서 둘도 없는 벗이고 고마운 대상이다. 어쩌면 이렇게 다정해지다가 언젠가는 더 멀리 날아갈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숱한 사람들이 써놓은 책 속으로 많은 여행을 하다가 나도 더 넓은 세상으로 글쓰기를 통하여 가 닿는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