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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Jun 27. 2024

김여사의 저녁

-미친년, 미친년.

저녁을 준비하며 김여사가 중얼거린다. 김여사는 마트에 장 보러 가서는 계란보다 맥주를 먼저 집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문을 열고 사고 온 맥주와 소주를 집어넣는다. 쌀을 씻어 밥통에 앉히고, 돼지고기와 김치를 볶고 나서 받아 놓았던 쌀뜨물을 붓고 가스불을 켰다. 아이들은 아직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맥주 하나를 꺼낸 김여사는 식탁으로 걸어가며 한 모금을 마셨다. 의자에 앉아 두 번째 입을 댄 후, 식탁 위에 있던 봉지김을 깠다. 요즘 김여사는 다이어트 중이다.


 -뭐 해? 바빠?

맥주를 마시다 말고 김여사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나 정말 어쩌면 좋으니.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민정엄마 알지? 그래, 이 년 전에 우리 딸 괴롭혔던 그 민정이. 초등학교 다니는 내내 나한테 언니, 언니 하면서 그렇게 친한 척하더니 민정이가 우리 딸한테 못되게 굴자마자 나랑 인연을 딱 끊었잖아.

-그러니까 나 정말 확 돌아서 알지? 그래도 지낸 정이 있어서 난 걔가 사과하면 받아주려고 했어. 얘들끼리 그럴 수 있다고 그러면서 크는 거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어. 전화 한 통도 없었다니까. 사람이면 그렇게 못 하지? 날 무시한 거야.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된 거라고.

-아니, 나도 말 안 했지. 내가 왜? 민정이 때문에 학교 안 다니겠다는 걸 겨우 달래서 졸업만 하자고 했어. 얘들은 얘들 이드라. 딸은 나중에는 괜찮대. 다시 놀았대. 그래도 난 용서 못하지. 우리 딸 필통 던지고 책상에 낙서하고, 아이들 다 보는 앞에서 책가방 쏟아버리고, 화장실 문 앞에 기다렸다가 들어오는 딸의 머리채를 잡았다니까.

-그래, 초등학교6학년의 어설픈 일진놀이에 우리 딸이 당한 거지. 근데 그 엄마는 그것도 모를걸. 원래 엄마들은 자기 딸에 대해 잘 몰라. 집에서는 안 그러니까.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는 건 맞지만, 밖에서 새다가 안에서는 가만히 있을 수도 있잖아

-아무튼 그 엄마랑 그래서 2년 동안 연락한 번 안 했어.  졸업식날에도 아는 척 안 했지. 중학교도 다르니까 만날 일고 없겠구나 싶었는데.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내가 정말 못 산다.


 상대가 말하는 동안 김여사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하나 더 꺼낸다. 냄비에서 찌개가 끓는 걸 확인하고 불을 줄였다. 핸드폰을 왼쪽 어깨에 걸친 채 맥주를 깐 김여사는 벌컥 마시고 나서 싱크대 위에 캔을 올려놓고, 다시 냉장고 문을 열어 대파와 두부를 꺼낸다. 계란 6개를 집었는데 하나가 떨어질 뻔했다. 김여사의 왼쪽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오늘 되게 더웠잖아. 그래서 내가 검정 선글라스를 끼고 학교에 갔거든. 응, 내가 맨날 끼는 레이벤선글라스. 아이들이 안 나왔길래 화장실에 갔다 오려고 실내에 들어갔는데 안에서 누가 "언니." 하며 반갑게 손을 흔드는 거야. 그래서 나도 손을 흔들었지." 어, 오랜만이야. 어머. 근데 너 너무 어려졌다. 학생인 줄 알았어." "어머 언니도 참 호호호 깔깔깔."그러면서 지나갔는데. 그게 누구였는 줄 알아?

-맞아. 민정엄마였어. 2년 동안 쌩까고 살았는데, 선글라스가 잘못이라고? 그래, 실내에서 안 보이긴 진짜 안 보였어. 화장실로 가는 내내 얼굴이 빨개지고. 진짜 내가 미친년소리가 절로 나왔다니까.

-그니까 내가 맥주를 안 마시고 배기겠냐고. 소주 마실까 하다 참았다니까. 잊어버리라고? 그래, 뭐 이제 와서 별도리는 없다마는 그래도 너무 창피한 거 있지. 나 자신이 너무 싫다. 나 어떡하면 좋을까?

-어? 잠깐만 찌개 끓인다. 야야. 우리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자. 그래 조만간 놀러 갈게. 응응. 고마워. 들어가.

 

  에어프라기 위에 핸드폰을  올려놓고, 캔을 기울여 마지막 맥주를 들이켠 김여사는 능숙한 전업주부모드로 들어가 재빨리 저녁상을 차린다. 취사가 다 됐다는 밥통소리에 맞춰 현관벨이 울린다. 김여사가 입을 닦으며 현관에서 들어오는 아이들을 꼭 안아준다.

 "수고했어. 배고프지? 얼른 손 씻어. 저녁 먹자."

 부엌으로 돌아온 김여사의 눈에 비어 있는 맥주캔 두 개가 보였다. 얼른 치우고 돌아서자 아이들이 부엌으로 들어오며 오늘 저녁은 뭐냐고 묻는다. 김여사는 검정선글라스와 민정엄마를 머릿속에서 지우며 "김치찌개"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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