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야 마는.
바빌론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시기를 다루고 있다. 당시 영화판은 무질서에 가까우며, 인권이나 노동자 보호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오랜 시간 내리 촬영을 하고 밤에는 약과 술에 취하고 향락에 젖어 날 것의 파티를 즐긴다.
매니는 허드렛일을 하는 이민자지만 촬영장에 가기를 꿈꾸는 사람이고, 넬리는 고된 삶 속에서도 자신은 스타로 태어났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 꿈 가득한 청년들은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촬영장에 입성하게 된다. 그야말로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는 그 곳을.
이들과 반대되는 상황인 잭 콘래드는 이미 숱한 전성기를 거쳐 아직도 흥행배우로 자리잡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매니의 패기를 알아 보고 자신과 함께 일할 것을 권유한다.
넬리는 한눈에 감독의 눈을 사로잡는 연기력과 특유의 매력으로 단숨의 스타의 반열에 올라선다. 허나 헐리우드의 시대는 급변한다. 소리를 입힌 영화인 유성영화의 등장에 적응하지 못한 넬리는 빠르게 추락한다. 잭 콘래드 역시 시대의 변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변화를 수용하는 사람처럼 구나 결국 누구보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몰리는 상황 속에서 넬리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뱀싸움을 제시하는데, 평소 골칫덩어리였던 그녀의 아빠는 끝내 뱀싸움을 하지 못하고 쓰러진다. 아무도 뱀과 싸우겠다 나서는 이가 없어 결국 넬리는 씩씩대며 직접 뱀과 마주한다. 이 난장판을 잭 콘래드는 한 발자국 멀리 서서 묘한 미소로 상황을 응시한다. 헐리우드는 천박하다 표현한 당시의 약혼자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탓일까. 약혼자의 비명에 그는 상황을 타개해보려 움직이지만 급작스레 차에 치이고 만다. 일순 뱀에 목덜미를 물렸던 넬리처럼. 잭 콘래드와 넬리 모두 무성영화의 틀 안에서 빛났던 스타이다. 그들은 급변하는 흐름에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나 다름 없다. 얼떨떨하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알림이나 다름 없으니.
잭 콘래드는 자신의 시대가 끝났다 표현한 칼럼니스트에게 화를 내며 찾아가지만 그녀가 하는 말에 이내 위로를 받으면서도 무언가를 체념한다.
“50년 후에 태어난 아이는 화면 너머 당신의 모습을 보며 당신을 잘 안다고 느낄 거야. 꼭 친구처럼. 당신은 그 애가 첫 숨을 내쉬기도 전에 이미 마지막 숨을 쉬었는데. 재능 있었잖아. 감사히 여겨. 오늘의 시간은 끝났지만 당신은 천사와 유령들과 함께 영원을 누릴 테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우리는 몇 십 년 전 영화를 보며 당시의 향수를 느낀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영화는 영원히 살아 남는다. 결국 해는 지기 마련이고, 한 때를 풍미하던 시대는 끝이 나는데도 영화만은 영원히 살아 남고야 만다.
넬리는 태어날 때부터 스타였기 때문에 그녀다운 마지막을 맞이한다. 바퀴벌레처럼 어둠 뒤에 숨어 살아 남기보다 어둠으로 뛰어드는 것을 택한다. 인생 참 아름답지... 중얼거리며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쓸쓸한 뒷모습은 생각보다 더 사무친다.
바빌론은 영화의 이면을 보여준다. 추악하고 향락적이며 자본주의에 찌들어 있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짓밟기까지 하는 잔인한 그 곳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너무나도 사랑한다고.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극장에 앉아 밀려드는 감정과 기억을 곱씹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매니처럼, 우리는 수많은 영화를 보고 느끼며 다양한 감정을 음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