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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zu Oct 13. 2022

책 쇼코의 미소 '관계와 단절을 모두 끌어안은 다정'



사람은 누구나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든, 상황에 의한 것이든. 타인과의 관계를 빼놓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세상이다. 세상이라는 것 자체가 수많은 사람들로 구성 된 것이니까.

책 쇼코의 미소에서는 평범하면서도 낯설지 않은 관계들이 연달아 나의 가슴을 두드린다. 때로는 먹먹하게, 이따금 차갑게. 이 단편집은 전반적으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회 안에서 도리 없이 흔들리고, 무수한 편견들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휘청이며, 관계와 생을 어떻게든 이어 나가기 위해 걷고 또 걷는 나의 동지들이 빼곡히 존재한다.



이 책은 삶의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이 선명하게 숨을 내쉰다. 단단하게 구성되는 여성 서사는 여성 독자인 나에게 온전한 공감대를 형성해 준다. 활자 안에 존재하는 이들이지만 내 옆에 있는 사람처럼 생생하게 공감하고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이자 가장 처음 나오는 단편인 쇼코의 미소는 일본인 교환학생이었던 쇼코와 이어지는 흔치 않은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쇼코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는다.

감정도 관계도 모두 서툴렀던 학생 시절 만난 친구는 행복한 추억임과 동시에 입 안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 같기도 하다.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실 그 애는 내 인생에 큰 존재는 아니었지만 그 애가 나에게 있어 중요한 어떤 것이기를 바랐다. 그런 갈망을 주는 우정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정 역시 사랑의 일환이기에 주인공이 말했 듯 쇼코와의 우정이 연애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친구와의 설익은 우정 하나에 목을 매던 어린 시기가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이다.

친구 하나가 내 인생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당장 무너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나는 자고 일어나 내일을 맞이할 것이고 세상도 똑같이 굴러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와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인공이 말했던 것처럼 그게 타인에게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정신적인 허영심일지라도.

쇼코와 주인공은 언젠가의 재회를 기약한다. 그게 쉽게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존재도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귀중한 존재였다는 것을 서로는 알고 있다. 누군가와 맺은 관계란 한 가지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복잡한 것이고 그것은 각각의 마음에 짙게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쇼코와 나눈 우정이 더없이 특별하다 나는 믿는다.



다음 이야기는 씬짜오, 씬짜오다. 이 이야기는 먹먹한 만큼 다정해서 분명 슬픈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이 이야기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극명히 존재하나 피해자가 결국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전쟁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새까만 상처 자국을 남기는 불행이다. 주인공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 응웬 아주머니와 죽이 잘 맞는 친구 투이를 좋아했다. 어린 나이에 타인을 좋아한다는 것은 일종의 순정이다. 바라는 것 없이 그저 잘 보이고 싶고 그가 행복하기를 바라니까. 그렇기에 응웬 아주머니와 관계가 비틀어졌을 때 주인공이 느낀 상심은 깊을 것이다. 관계의 비틀림이 자신의 입에서 시작된 거라면 더더욱.

낯선 땅 독일에서 친해진 응웬 아주머니의 식구들. 주인공은 천진하게 말한다.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 없어요." 주인공에게 있어 제 모국은 완전무결한 피해자일 뿐이다.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은 무해한 영웅. 허나 실상은 달랐다. 응웬 아주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참혹하게 한국군에게 학살당한 베트남인들의 이야기다.

주인공의 무지한  마디로  가족의 관계는 한순간에 완전히 어긋나 버린다. 주인공이 말한다.

어차피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라는 마음이 그날 , 아줌마와 우리 사이를 안전하게 갈라놓았다. 그건 서로를 미워하고 싶지도, 서로로 인해 더는 다치고 싶지도 않은 어른들의 평범한 선택이었다. 서로 다른 입장에 놓여 있고 절대로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을 기반한 포기를 어른들은 쉽게 한다. 그건 특별할 것도 없는 당연한 수순과도 같은 것이다. 

어떤 관계에서 정답이라는  없다. 다만 주인공은 응웬 아주머니가 건넸던 친절과 따스한 말들, 무한하게 여겨지는 포용을 간직할 것이다. 조금의 자책과 일말의 죄책을 함께 섞어서.



이 책에서 내게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이야기는 한지와 영주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단편이 완벽하게 나의 취향은 아니었다. 어딘가 비틀거리고, 낯설고, 휘청거리며 헤매는 청춘이 얼핏 서툴렀던 나를 보는 것도 같아서.

낯선 땅에서 만난 영주와 한지의 관계는 아름답다. 서로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도 없이 그저 시간을 함께 나눌 뿐이다.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말들을 삼켜 담으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친근한 시간들을 함께 거닌다. 한 발자국 떨어져 그들을 바라보는 주변인들에게도 시간의 온기가 느껴질 정도다. 그렇기에 갑자기 단절된 한지와 영주의 관계는 그들 본인이 아닌 다른 이에게도 끔찍하게 다가간다.

하루아침에 어떠한 언질도 없이 일방적으로 끊어진 관계의 앞에서 영주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다시 관계를 잇기 위해 한지를 두드리고 부추기는 것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영주는 포기하고야 만다.

시간은 모든 것을 부식시킨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영원한 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그렇기에 영주는 한지와 함께 하던 밤의 산책이 영원하기를 꿈꿨을 것이다. 절대로 영원할 수 없는 순간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영주가 한지에게 했던 말들을 좋아한다.

결국 마주쳐버린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본다. 한지의 맑은 눈이 자신을 피하지 않고  자리에 머무는 것을 보고 영주는 전에 없던 용기가 치솟았을 것이다. 따뜻했던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솔직하고 간절한 바람. 영주는 한지에게 말한다.

"네가  이러는지 묻지 않을게. 알게 된다면 마음은 후련하겠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겠니."

그렇게 담담히 발화했던 말은 감정을 안고 세게 타오른다.

"네가 나에게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난상관  . 세상 어디에도  미워할  있는 방법은 없어. 한지, 제발 이렇게  인생에서 사라지지 ." 

본인의 마음과 상관없이 멀어져 버리고야 마는 것을 붙잡는 간절함이 눅눅히 묻어난다. 너를 붙잡고 싶다는 소망이 파도가 되어 넘실거린다.

말에서 상대를 향한 애정과 슬픔이 이토록 듬뿍 묻어날 수 있을까. 끝끝내 한지는 어떠한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결국 와르르 무너져 내린 관계가 왜 그렇게 됐는지 영주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더 애틋하게 남아있지 않을까.

살면서 타인의 마음을 온전하게 알게 되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일 거다. 보드라웠던 교류가 꿈이라도 되는 듯 발생하는 적막한 단절. 정말로 잘하고 싶었던, 아끼고 또 아꼈던 관계에서 결국 실패하고야 마는 일을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것이다. 너무나 좋은 사람을 만났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관계 앞에서 서투른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다. 너무 들떠 평소의 나와 다른 모습을 보일 수도 있고 나도 모르는 사이 그에게 실망을 안겨줄 수도 있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 상처로 꽂힐 수도 있겠지. 그런 실수 틈에서 관계는 서서히 조각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아주 조금씩 금이 가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와르르 깨져 버리면 그제야 허둥지둥 관계를 정돈하고 어루만진다. 상처받을까 봐 더는 다가가고 싶지 않은 마음과 어떻게 해서든 이 유대를 쥐고 싶은 마음이 거세게 부딪히곤 한다. 그 안에 결코 답은 없을 것이다. 한지의 마음을 알았으면 하지만 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게 서글프다. 하지만 그런 슬픔 속에서 사람은 성장하리라고 믿는다. 다음 관계에서는 좀 더 세심하게 타인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때만큼 많이 휘청거리지 않겠지.

영주 역시 그러지 않을까? 한지와 나눴던 우정은 해답 없이 증발했지만 함께 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 영주가 모든 것을 잃은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지와 함께 걸었던 어두운 밤의 바람과, 나긋하였던 그의 이야기가 영주에게 있어 기꺼운 행복일 것이다.



페테르부르크라는 먼 곳으로 선배를 만나러 간 주인공, 이어지는 이야기는 먼 곳에서 온 노래다. 부당함에 소리를 낼 줄 알았던 미진 선배는 주인공에게 있어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다. 가볍게 말을 놓을 만큼 편안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크게 보였던 무거운 사람. 어쩐지 눈길이 가고 따르고 싶어지는 어른 같은 존재.

학교 술자리에서 미진 선배는 부당한 대우와 저급한 편견에 맞서 싸운다. 모든 것이 끝나고 혼자 눈물을 흘릴지언정 속으로 삭이며 침묵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미움을 견디기로 마음먹었지만 상처받는 걸 피할 수는 없었을 거다.

주인공에게 있어 미진 선배는 언제나 어른스러운 사람이다. 넘을 수 없는 산 같은. 그에 비해 자신은 한 없이 미숙하고 작아 보이기만 하는 존재. 그렇기에 애정 하면서도 질투했을 거다.

미진 선배를 보내고 난 뒤 주인공은 괴로워한다. 갑작스러운 상실에 태연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미진 선배의 친구였던 율라와 함께 아픔을 나누며 주인공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미진 선배를 기억한다. 결코 끊이지 않을 노래처럼.



짧지만 통렬한 단편인 미카엘라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깊은 아픔으로 남아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글 중 어디에서도 그 단어를 명시하지 않지만 우리는 알 수 있다. 가장 사랑하는 이를 무력하게 잃어버리고야 말았던 그 잔인한 날을. 미카엘라라는 세례명이 겹쳐지는 마지막 순간 느꼈던 감정을 무어라 칭해야 할까.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이 숨어있다.



마지막 장에는 비밀이라는 가볍고도 무거운 제목과 함께 할머니 말자와 손녀 지민의 이야기가 나온다.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천대받고 살았던 말자는 뭐든 잘 해내는 손녀 지민에게 처음으로 글자를 배우게 된다. 글 속에서 이 부분은 그리 길게 다뤄지지 않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세심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말자에게 있어 의미 모를 그림들이 글자로 재탄생되는 순간이 너무도 찬란했다. 일평생 갈망했던 배움을 손녀에게 처음으로 배웠던 순간 말자가 느꼈던 희열은 어떤 농도였을까. 죽어있던 흑백의 세상에 천연의 색이 입혀지는 그런 황홀이 아니었을까. 말자는 이제 생의 끝이 손아귀의 잡힌다. 허나 두렵지 않았고 미련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살아 있다는 것도 두렵다는 점에서는 죽음과 진배없었다.

말자는 삶과 죽음을 그렇게 표현했다.

왜 삶과 죽음은 각기 다른 의미로 두려움을 안겨 줄까. 살아가는데 있어서 두려움에 맞설 용기는 너무 자주, 또 많이 필요하다. 제 첫 선생이자 마지막 선생일 손녀 지민에게 말자는 편지를 적어 내린다. 서툴고 삐뚤빼뚤할 글씨가 눈앞에 선연하다. 그 안에 담긴 마음과 사랑은 절대로 서투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단단한 밀도로 쌓인 완전한 사랑이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관계와 단절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따뜻하게 타오른다. 결코 따뜻하고 착하기만한 이야기들이 아니다. 누군가의 우울과 아픔이 생생하게 그어져 있다. 그렇지만 다정하게 일렁인다. 이 온기를 입고 더 이상 혼자 넘어지지 말라며 내 어깨를 다독이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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