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학원생 편
#1
뜬금없지만 저는 속담을 좋아합니다. '인생사 새옹지마', '고생 끝에 낙이 온다' 같은 흔한 속담들 말입니다. 속담에는 정말 흥미로운 특징이 있는데 과거에 교류가 없던 문화권에서도 거의 동일한 의미의 속담들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하나의 예시로 영미권에서는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라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리는 속담이 있죠. 가만 생각해보면 몇천년 넘는 인류의 역사에서 어쩌면 속담이야 말로 조상분들의 인간의 특성에 대한 빅데이터 기반 회귀 인공지능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데이터가 축적되면서 각각의 집단 인공지능 모델이 같은 함수로 수렴되어 왔던 것이죠. 외국 어딜가던 음식 떨어뜨린 다음 3초안에 주우면 먹을 수 있다는 농담에는 다들 똑같이 즐거워합니다. 여담으로 훈련소에서 만난 서울대 출신 친구 녀석은 컴퓨터로 계산하면 마이크로 초인가 나노 초안에 주워야된다더라고요. 그 말을 들은 뒤 부터는 저는 항상 음식이 떨어지면 나노 초안에 줍습니다. 하하하.
#2
놀랍지만 인류의 범주 안에 포함되는 대학원생들에게도 이러한 빅데이터를 통해 만들어진 오래된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학사때는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고, 석사때는 자기가 아는게 없다는걸 알게 되고, 박사때는 자기가 뭘 모르는지 알게 되고, 교수가되면 나도 모르는데 내가 말하면 다 믿더라'. 여기서부터 대학원생들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자신감 넘치게 석사를 입학해서 처음에는 신나게 연구를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점점 내가 알던 학부 지식은 상당히 얕다는 걸 알게 되죠(그럼에도 기초 학부 지식은 굉장히 굉장히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열심히 석사를 마무리하고 석사 때 경험을 바탕으로 박사주제를 생각해냅니다. 그러면서 생각하죠 '그래 이 주제만큼은 끝까지 파보자!' 그러면 보통 박사 1-2년은 또 열심히 달립니다. 근데 이쯤에서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근데 내가 하고 있는 연구...이 세상에 의미가 있을까?' 지금까지는 내가 모르는 걸 정복한다는 목표로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잠깐 거리를 두고 내 연구를 보니까 소위 현타가 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순간을 '앎의 저주'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 시기에 대학원생의 심리는 아래 짤과 같습니다.
#3
'앎의 저주'가 생기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남이 떡이 커보인다고 멋모를때는 내가 잡은 박사주제가 정말 이 세상에 유익한 연구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공부를 많이 할수록 우리는 남들이 모르는 것도 알게되고 이때 안타깝게도 내 연구의 한계도 같이 알게됩니다. 그러니까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죠'. 사실 제가 연구하고 있는 인공지능 분야도 가장 대표적인 이러한 분야이긴 합니다. 재밌는 점은 오히려 설렁설렁 박사를 하는 친구들한테는 '앎의 저주'가 오지 않습니다. 내가 뭘 모르는지 혹은 내 연구의 한계가 뭔지 알지도 못하기떄문이죠. 긍정적으로 말씀드리면 여러분이 만약 박사 과정동안 이 '앎의 저주'를 마주했다면, 축하합니다! 당신은 최소한 진심으로 당신 주제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했습니다. 이 지식들은 훗날 아주 분명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4
자, 이제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하나, 주제를 바꾼다 (와우! 내 2년!). 둘, 내 연구의 의미를 찾는다. 정답은 없습니다. 만 명의 대학원생에게는 만 개의 상황이 있고, 만개의 주제가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저는 후배들에게 너가 정녕 원해서 선택한 주제라면 밀고 나가라, 의미를 찾아라라고 추천하기는 합니다. 때로는 여러분이 연구를 잘하는 것 보다, 여러분 연구의 의미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 학회를 가시면 서구권 사람들은 자신의 발표에서 '내가 이 연구를 왜 하는가' 그리고 '이게 얼마나 멋진가'에 가장 큰 비중을 둡니다. 반면 동양권 특히 한국과 일본은 '내 연구의 방법론과 결과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에 더 큰 비중을 두죠. 개인적으로 간혹 심한 서구권 친구들의 과장이 제 취향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의 자세를 참고할 필요는 있습니다.
#5
많은 대학원생들이 오해하는 것이있습니다. 여러분의 연구가 A를 사용해서 B를 만드는 것이라 하죠. 그런데 B를 막상 만들어보니까 당초 목표했던 C조건까지 버티지를 못합니다. 만약 우리가 회사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입장이라면 이건 큰일입니다 당장 양산을 해야하기때문이죠. 하지만 여러분이 연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물론 아쉽겠지만 이것이 '연구적'으로 의미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은 '왜' C조건을 버티지 못하는지 이유를 설명할 수 있으면 됩니다. 물론 이렇게 우리가 초기에 원하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는 더욱더 이론과 기초 공부에 치열하게 집중해서 멋지게 설명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렇다면 미래의 연구자들이 심지어 A 물질, B 물질, C조건에 관심도 없지만, 여러분들이 설명해낸 이론을 D물질, E물질, F조건 연구에 참고할 수가 있습니다. 연구과제나 특허관점에서는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논문에서 중요한 것은 저는 '여러분이 세운 목표 달성 여부' 보다는 이 논문이 '미래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냐'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 세상에 유익할 연구 주제를 선정하려 노력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만, 처음 계획이 틀어지더라도 방법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6
저는 박사학위로 기체 상태에서 불이 날 수 있는 수소 농도(가연한계농도; lower flammability limit) 를 예측하는 물리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이 농도가 기체 온도와 조성비 그리고 희석제 유형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재밌는 것은 최근 제 논문을 인용하는 논문들을 보면 가연한계농도 예측과는 전혀 상관 없이 수소 혹은 메탄 화염의 특성을 분석하는 시뮬레아션, 실험 논문들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학계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치 있는 연구입니다.
#7
어떻게 보면 이러한 제 생각들이 연구자들의 변명이라고도 생각될 수 있겠습니다. 실패해도 되니 스트레스 받지말고 연구해라라는 차원이 아니라, 실패해도 되니 다음 연구자들을 위해 학문적인 가치가 있는 고민과 생각들을 정리해라라는 차원입니다. 사실 연구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후자가 더 어렵습니다 하하. 부디 여러분이 외국까지 어렵게 가서 가려했던 맛집이 문을 닫았더라도, 그 옆에 들어간 식당이 더 여러분 취향이길 바라겠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포닥편을 작성해보겠습니다. 포켓몬스터로 치면 어니부기 편이겠네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