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있는 하루가 주는 기쁨

by 김정준







어린 시절 국민(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생활계획표를 만들어 책상 앞에 붙여두곤 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계획표를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했고, 숙제와 복습, 놀이 시간, 책 읽는 시간, 휴식, 취침 시간까지 가능한 한 정해진 순서에 맞춰 실천하려 애썼습니다. 때로는 계획대로 되지 않아 속상할 때도 있었지만, 그 계획표는 언제나 생활의 중심을 잡아 주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히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하루를 마칠 때면 작은 성취감이 남았습니다.


대학 시절과 직장 생활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강의 시간표와 업무 일정들이 자연스럽게 하루의 틀을 만들어 주었고, 생활은 비교적 규칙적이고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습니다.


문제는 퇴직 이후 찾아왔습니다. 오랫동안 몸담았던 직장을 떠나고 나니 갑자기 넉넉한 시간이 손에 쥐어졌습니다. 처음에는 그 자유가 달콤하게 느껴졌습니다. 더 이상 알람 소리에 쫓기지 않아도 되고, 출근 시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오래지 않아 방향을 잃은 시간으로 변해 갔습니다.

졸음이 오면 낮에도 거리낌 없이 누워 한참을 자고, 밤이 되면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며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습니다. 친구들과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늦은 밤까지 술잔을 기울였고, TV로 영화를 보거나 미니시리즈, 다큐멘터리에 빠져 “한 회만 더”를 되뇌다가 새벽을 맞았습니다. 흥미로운 책을 손에 들면 페이지를 넘기느라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였습니다. 다음 날 일정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무계획적인 생활이 이어지면서 하루의 리듬은 완전히 흐트러졌습니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들쑥날쑥해지고,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 역시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해가 중천에 떠서야 겨우 이불속에서 빠져나오는 날도 많았으며, 식사 시간도 제때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여파로 몸은 무겁고, 시도 때도 없이 두통이 찾아왔으며, 정신은 늘 몽롱했고, 입맛은 떨어져 밥을 먹어도 모래를 씹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생활을 계속하면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고, 없던 병까지 생길 것만 같았습니다.


결국 나는 이런 무의미한 생활을 끊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루를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다시 삶의 틀을 세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린 시절 책상 앞에 붙여 두었던 생활계획표를 떠올리며, 이번에는 ‘노후의 생활계획표’를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적어 내려갔습니다. 막연히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만으로는 실천에 옮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시간과 활동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정했습니다. 취침 시간과 기상 시간을 먼저 정하고, 아침에 일어나 몸을 풀어 주는 스트레칭 시간을 배치했습니다.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시간,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며 글을 쓰는 시간도 따로 마련했습니다. 헬스장에서 땀 흘리며 운동하는 시간과 바깥에서 걷기 운동을 하는 시간도 구분해 넣었으며, 독서, 음악 감상, 텔레비전 시청 시간까지 적절히 나누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식사 시간을 일정하게 못 박은 것입니다. 물론 집안 행사나 친지 방문, 친구와의 만남, 여행 같은 특별한 일이 생길 때는 유연하게 조정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하루의 틀을 정해 놓고 하나씩 실천해 나가자 삶이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몸을 움직이니 하루의 시작이 훨씬 가벼웠고,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으니 시간이 막연하게 늘어지지 않았습니다. 계획표의 순서대로 하나씩 채워 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성취감이 쌓였고, 하루하루가 알차게 느껴졌습니다. 예전에는 제멋대로 흐르던 시간이 이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도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흘러갔습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마음의 상태였습니다. 노년이 되면 누구나 외로움을 느끼기 마련이지만, 규칙적인 생활 속에서는 그 외로움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거의 없었습니다. 몸을 움직여 스스로 정한 일을 차분히 해내는 과정에서 마음이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마칠 때면 오늘도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뿌듯함은 생각보다 큰 힘이 되었고, 그 힘이 다음 날을 살아갈 의욕으로 이어졌습니다.


규칙적인 생활은 신체 건강과 정신 건강 모두에 큰 도움을 줍니다. 몸은 반복되는 생활 리듬 속에서 안정감을 얻고, 마음은 작은 성취와 만족을 통해 활력을 되찾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하루가 의미 있게 느껴지고, 스스로 삶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함과 자부심이 생깁니다.


돌이켜 보면, 행복은 특별한 순간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세운 계획을 지키며 보내는 평범한 하루하루가 쌓여 삶을 보람 있게 만들어 줍니다. 제가 하루의 주인이 되어 시간을 사용하고, 그 시간 속에 저만의 의미를 부여할 때 마음은 안정되고 삶에 대한 만족도 높아집니다.


이제 생활계획표는 더 이상 어린 시절 책상 앞에 붙어 있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삶을 지탱해 주는 든든한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저는 정해진 시간에 하루를 시작하고, 작은 약속들을 하나씩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채워진 하루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기쁨을 남기고, 그 기쁨이 모여 내일을 기대하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