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자의 실무_10 >
기획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자세 중 하나가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는 것이다. 기획자는 괜한 자존심 싸움으로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만큼 많이 공부했기 때문에 누군가 반대 의견을 제시할 때 내 생각이 맞다는 확신으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실제로 대부분 맞는 편이긴 하다. 그러나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에 전략을 잘못짚었을 수도 있다. 몰랐다면 할 수 없지만, 알게 된 이상 그 사실을 고집하진 말아야 한다.
기획자가 굳은 신념으로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독불장군처럼 일을 진행하게 되면 결국 팀원들에게 부담을 주게 된다. 그리고 프로젝트가 실패했을 경우 서로 부족했음을 반성하기보다 남 탓을 하게 되는 풍조에 물씬 기여하게 된다.
중요한 자문을 통해 결정적인 승리의 실마리를 얻었는데 그것이 현재 진행하고 있는 방향과 다를 때이다. 자문은 보통 구성안이 나온 다음 후반부에 진행하기 때문에, 자문으로 인해 무언가를 수정해야 할 때 팀원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전시기획에서는 주제가 바뀌면 하부 스토리는 물론 공간개념 및 세부연출이 통째로 흔들린다. 대부분 공동작업의 특성과 시간문제로 큰 틀을 바꾸지 않고 덧칠하는 식으로 수정 보완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앞에서 실컷 주장한 전략들이 뒤에 보이지 않게 되어 공허한 말장난이 되기 쉽다. 구현도 하지 못할 것이면서 근사하게 만들어 놓은 말들이 아까워 붙잡고 있는 미련을 떨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멋지고 예뻐도 안 맞는 것들은 과감하게 포기하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강조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발주처에 해당하는 곳에서 특정 단어에 대한 취향이나 선호도 때문에 중요한 키워드를 반대하거나 주장할 때이다. 어떤 발주처 대표는 사자성어를 선호하고 어떤 대표는 영어를 싫어하고, 어떤 대표는 조어와 합성어를 싫어한다고 하자. 아주 보수적인 심사위원에 따라 기획자가 임의대로 합성해서 만든 신조어 류의 개념은 폄하하기를 넘어 혐오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경험상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럴 때 굳이 내가 옳다고 그들의 선호도를 바꾸려 한다거나 가르치려 하는 자세는 금물이다. 유연한 기획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조건 안에서 그들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주제어를 다시 한번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특별히 좋은 아이디어는 반드시 단점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단점이 누군가 물고 늘어져 위험요인으로 부각될 가능성이 있다면 신중해야 한다. 기술적인 문제, 행정적인 문제, 운영상의 문제에 대한 모든 솔루션을 완벽하게 준비해 놓고 제안해야 한다. 공모경쟁에서는 눈에 띄는 확실한 아이디어를 마련하기 위해 무리하게 연출을 하거나 검증되지 않은 기술을 과장되게 표현할 때가 많다. 그러나 예리한 심사위원은 기술적 허점을 지적할 수 있고, 그것을 설명하고 설득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면 결국 좋은 아이디어가 아닌 것이 된다. 기획자는 이 상황까지 충분히 내다보고 배팅을 해야 한다. 하여, 계획이 그림으로서만 의미 있는 연출일 경우, 다수가 걱정을 한다면 과감하게 접을 용기가 필요하다.
다음은 무리한 연출로 심사위원의 기술적인 지적을 받고도 그 효과만 강하게 설득하려다가 실패한 프로젝트의 사례이다. 돌아보면 그때 이 프로젝트 말고도 다른 일이 겹치면서 시간적으로 몰리자 급하게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다가 무리수를 두게 된 것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자성대 공원의 활성화를 위해 인위적인 구조물을 세우고 브리지를 조성하였는데 공원 내 문화재에 해당하는 부산진성의 외관 이미지를 부각하기보다 축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공원 산책을 연결한다는 의미에서 의도는 좋았으나 필수적인 미션에 해당하지도 않았는데 너무 과하게 연출되었다. 한술 더 떠 아래 투시도를 보면 브리지가 공원 바깥으로 까지 연결되면서 단독 건물과 부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 공원 외부의 재봉틀 체험공방으로 바로 동선을 만들자는 취지였지만 심사위원들은 거리 미관과 기술적인 문제, 필요성, 예산 부분을 집요하게 질문하며 공원 내 다른 구역의 연출을 보여줄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기획자가 이전에 잡은 안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안이 좋거나 그 안이 꼭 정답이어서가 아니다. 다시 씨줄 날줄을 엮어 같은 과정을 통해 머리 아프게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안을 과감히 접을 용기는, 결국 그것 말고 또 다른 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 능력은 불행히도 프로젝트당 한 번의 기획으로만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해 온 기획자들에게는 절대 생겨나지 않는다. 가끔 타성에 젖어 한번 휘리릭 작성한 원고 그대로 수정도 없이 일을 진행하려고 하는 기획자들을 볼 때가 있다. 그런 완벽한 생각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생각지도 못한 어떤 변수에 의해 안이 엎어지고, 그림이 달라지고, 다시 하고, 두 번 세 번 하는 과정을 통해 기획의 맷집이 강해지는 것이다. 어떤 프로젝트건, 시간이 얼마나 남았건, 누구와 작업하건, 자판기처럼 솔루션이 척척 나오는 기획자가 되려면 아무렇지도 않게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를 모조리 당장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