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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겁쟁이 선비 Dec 08. 2023

꽃꽂이 하는 남자

꽃 향기만 남기고 갔단다~♪




'쇼미더럭키짱!' 말대꾸 밈 응용해 봤습니다.


놀랍게도 원데이 클래스가 아니다


진짜 진지하게 화훼장식기능사를 취득할 목적으로 4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주말마다 꽃집에 가서 배우고 연습하며 작품을 만들었다. 시험 출제 작품을 스스로 만들 수 있을 무렵부터는 새벽부터 강남 고속터미널 3층 화훼상가에 가서 꽃과 소재를 구매하는 것까지 직접 했다. 주말을 반납하며 지식을 쌓고 기술을 익히기 위해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건 직장인에게 정말 큰 결심인데, 30대에 접어든 남자인 나는 어쩌다가 뜬금없이 꽃꽂이에 진심모드가 되었던 걸까? 모종의 동기나 사유가 있었던 걸까? 그 시작은 브런치에 가장 처음 썼던 글인 '낙산사 템플스테이'를 결심했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번째 글인 '관음성지 낙산사 템플스테이①' 도입부인 '발단'에 적었던 것처럼 2020년부터 2021년 봄까지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해당 글에 적었던 것처럼 아주 긍정적으로 돌이켜보면 짐짓 성장할 수 있었던, 그런 업무 상의 스트레스였지만 당시의 나는 일요일 오후만 되면 월요일 출근 스트레스에 여러 가지 불안 증세를 보이며 두통을 호소했다. 그토록 내가 사랑하는 주말의 올림픽공원에서, 석촌호수에서, 한강에서 제아무리 심신을 달래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월요일 아침 출근해서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는 현실은 하나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나의 천성적인 S-T-J(현실적이고 논리적이고 계획지향적) 성향을 통해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출근해서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안타깝게도 '저연차 신입인 주니어가 많으면 얼마나 많겠어?'가 통용되지 않는 범주와 분량의 업무들이었다. 스마트하게 일처리 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주니어에게 무슨 업무 스킬과 센스, 노하우가 있을까. 기대할 수 있는 건 그저 신입사원의 근성과 열정뿐이었다. 더군다나 실수를 하면 안 되었기에 자신 있어하던 계산과 숫자에 역으로 더한 강박에 갇혀 완벽주의를 추구해야 했다. 여기에 더해 새하얗게 비어있는 16:9의 PPT를 가독성 높고 깔끔하게 채워야 하는 리서치와 신규 기획 업무들은 내 머리를 매일매일 새까맣게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당시는 그런 시절이었다.


인스타그램에도 남아있는 고통과 고뇌의 흔적(현실도피에 실패했다). 주말 저녁의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그래서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루틴 유지를 통한 안정성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ISTJ인 나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과감한 변화와 혁신을 통한 개선을 추진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연하게도, 안정성의 수호자는 온건개혁파이기에 '퇴사'라는 과격하고 급진적인 옵션은 선택지에 없었다.) 그 변화와 혁신의 세 가지는 각각 ① 운동의 시작, ② 템플스테이 휴가, ③ 취미/특기 저변의 확대였다. 온건개혁파답게 큰 범주 내에서 루틴의 항상성은 유지하되 부차적인 요소들을 통해 변화를 꾀했다. 그중 취미 저변의 확대가 바로 꽃꽂이와 바리스타였다. 운동과 템플스테이, 커피까지는 그렇다 쳐도, 왜 많고 많은 것들 중에 꽃꽂이였을까? 물론 '관심이 있어서', '한번 즈음해보고 싶어서'라는 마냥 단순한 이유는 아니었다.






우선은 당장 위험요소가 되고 있는 고강도 스트레스를 건전하게 해소할 수 있는 독특하고 신선한 취미생활이라는 점이 매력적이어서 꽃꽂이를 선택했다. 이른바 남성 화훼장식 전문가는 생각보다 드물다. 대한민국에서 꽃을 생업으로 삼은 남자가 몇이나 될까? 그 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은 동네 꽃집 몇 군데를 방문해 봐도 통계적 추론으로 어렵지 않게 어림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업(業)이 관념적으로 주는 모종의 선입견이나 편견도 물론이겠거니와 일단 남성 종사자 수 자체가 우리가 흔히 아는 산업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그 희소성에 매력을 느꼈다. 이 부분은 데이터의 수치로도 짐작이 가능한 부분인데, 고용노동부와 한국고용정보원이 운영하는 워크넷의 직업정보에 따르면 전문 자격증을 취득 후 활동하는 플로리스트 수는 전국 약 2,000여 명, 2021년 11월 기준 국세청 통계를 보면 지난해 11월 등록된 꽃가게는 전국에 25,620개다. 2,000여 명을 기준으로 두나, 2.5만여 곳의 꽃집을 기준으로 두나 50:50의 성비를 가정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천명에서 많게는 1.2만 명이니 5,155만의 인구 중 0.0019%~0.023%가 꽃을 업(業)으로 삼는 남성인 거다. (*화훼농가 제외)


그래서 나도 몇 없을 게 분명한 남성 화훼 전문가 집단, 그중 하나가 되고 싶었다. 유별난 이유였지만 희소하다는 건 생각보다 매력적이고 가치가 높게 책정되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대감으로 화훼를 공부하는 과정 자체를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분명 건전한 스트레스 해소라는 소기의 목적 달성에는 일조했으나 종국에는 또 다른 *스트레스로 돌아오고 말았다. (*주말에 조기 기상이 강제되는 점, 외출 싫어하는 내향형 i가 사람 많은 반포동 꽃시장까지 나가서 구매를 위한 흥정까지 해야 하는 점, 가뜩이나 손이 느린데 촉박한 시간에 맞춰 빠르고 정확하게 실기 과제를 완성해야 하는 점, 소질이 하나도 없는 디자인과 색 배합을 더 공부해야 하는 점 등)


피로감에 꾸벅꾸벅 졸다가 막상 화훼상가 도착하면 오감이 즐거워진다






두 번째는 기왕 배우는 거, 기술이 남는 것으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과 더불어 그 기술을 활용해서 나중에 회사를 때려치우고 바리스타, 꽃꽂이, 사주를 하나로 엮은 특성화 카페를 차려보자는 장대한 계획이 있었다. 카페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주팔자도 봐주고, 그에 맞는 꽃말에 해당하는 꽃으로 작품도 하나 만들어주고, 더 얹어서 커피까지 팔면 꽤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기본적으로 이 비즈니스 모델은 객단가를 높게 책정할 수 있어서 일정 고객풀만 확보된다면 사업 유지를 넘어 이윤을 남기는 게 가능할 것 같았고, 고객풀 확보를 위한 방문고객의 경험을 카페의 로열티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역치가 높지 않을 것 같아서 나름 큰 그림을 그려본 것이다.


Z세대부터 알파세대까지 오프라인에서의 경험은 작금의 트렌드 그 자체이고, (점점 늘어나는 각종 브랜드의 팝업스토어 레퍼런스들이 이를 방증한다.) 이 경험은 오프라인 바이럴이나 SNS 바이럴로 유연하게 연결할 수 있다. 추가로 주기적으로 혜택을 주는 멤버십 구독 프로그램까지 확장한다면 강력한 락인효과를 기대할 수 있고 충성고객도 꾸준히 양성할 수 있어 돈방석에 앉는 장밋빛 미래를 점쳐볼 만했다. 매우 솔깃할 수도 있겠으나 이 사업의 성공 여부는(=실제 방문했을 때 얼마나 매력적인 경험을 줄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내 역량이기에 해당 비즈니스 모델의 가능성은 미지수다. 하지만 사업 모델과 달리 기술은 어디 도망가지 않으니까 배워두면 언젠가, 어딘가 쓸모 있지 않을까 싶었다.






세 번째는 가장 시답잖은 이유인데, 나의 매력 상승을 위해서였다. 30대 무렵의 연애시장, 결혼시장을 찍먹 해본 결과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매서운 바다' 같은 인상을 받았다. 서로 재보는 각고의 신경전도 치열했고, 내 기준치도 꺼질 줄 모르는 욕망의 거품 덩어리였기 때문에 나름 '잘' 살아남기 위해 경쟁력 하나 더 갖춘다는 느낌으로 배웠다. 꽃을 싫어할 여성은 드물 것이고, 꽃을 화두로 한 이야기는 쉽게 대화를 풍성하게 해 주고 거리감을 좁히는데 유용할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한 대로 남성 화훼전문가가 희소한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한 법. 이런 기대와 다르게 유감스럽게도 나에게 꽃을 선물 받은 여성들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내가 떠나보낸 거 아니다 ㅠ)


뭐 굳이 썸녀나 소개팅녀가 아니더라도 작품을 직접 만들어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다. 레슨하는 매주 토요일마다 만든 작품을 그대로 집에 가져갔는데 엄마가 무척 좋아했다. 화사하게 장식된 꽃 장식이 그것도 매주 다른 작품으로 교체되니 꽃을 좋아하는 엄마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내 앞에선 별 내색 안 하는 아빠도 좋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니 만드는 내 입장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연습할 수 있었다. 작품을 가장 먼저 접하는 가족들의 반응이 호의적이고 긍정적이어서 그랬는지 배우면 배울수록 작품을 통해 누군가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욕심이 안 생길 수 없었다. 은은하게 집안을 채우는 꽃 향기까지 떠올려보면, 여러모로 생각보다 꽃이 주는 행복과 고양감은 적지 않았다. (그만큼 내 월급이 무참히 갈려나갔지만.)


'꽃꽂이 배운 이유' 세 줄 요약
1. 스트레스 (독특하게) 풀려고
2. 기술 배워서 사업해 보려고
3. 이성에게 잘 보이려고



어줍잖게 고생고생해서 만들지만 막상 다 만들고 보면 결과물이 제법 만족스럽다. (서양꽃꽂이 반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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