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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겁쟁이 선비 Dec 14. 2022

관음성지 낙산사 템플스테이 ④

겁쟁이 선비의 인생 첫 번째 템플스테이



13. 연등

저녁식사 후 템플스테이 숙소에서 조금 쉬다가 부처님 오신 날 예불 및 연등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경내 대전인 원통보전으로 향했다. 예불에 참여하는 건 남자들이라면 으레 한 번씩은 해본 훈련소 종교행사가 전부여서, (그 마저도 태반은 졸았다.) 제대로 참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연등행사도 처음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몰라서 앞에 예불을 인도하시는 스님을 따라 하거나 예불에 참여하신 불자분들을 따라 눈치껏 합장했다. 반야심경도 노래처럼 외웠는데 아는 게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원통보전 앞에서 하는 예불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처음 하는 거니까 생소함이 앞설 뿐이지.


일몰 무렵 저녁 예불에 참가하러 원통보전으로 향하는 템플스테이 참가자들 © 2021. 겁쟁이 선비. All right reserved.


그리고 연등을 하나씩 나눠주시고 불을 붙여주셨는데, 저녁 예불에 참석하신 백 여분 남짓의 참배객들이 이를 들고 원통보전을 시작으로 사찰을 돌아다니는 연등행사의 광경은 아직도 망막에 맺힐 만큼 선명하게 아름다웠다. 더 나아가 알록달록 일장 행렬이 적막한 경내에서 “석가모니불”을 외며 돌아다니는 모습에는 일종의 경외심까지 느껴진다. 예불에 참여하는 불자들의 원(願)과 소망, 믿음과 의지가 맺힌 눈과 손짓, 마음의 고백, 그리고 외부에 내려앉은 저녁 어스름의 어둠을 밝히는 연등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감히 형용할 수 없었다. 무겁게 내려앉았다기보다는 단단하고 견고하며 굳세다는 느낌이 부합할 듯싶다.


일몰 이후 낙산은 알록달록한 연등 색으로 물든다. © 2021. 겁쟁이 선비. All right reserved.


경내가 원체 넓다 보니 저녁 예불보다는 사찰을 도는 연등행사가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적잖은 참배객들을 이끌고 느린 걸음으로 낙산사 일원 모두를 도는 행사이기에 더욱이 그렇다. 연등행사의 종착지는 보타전. 전각 내 1,500좌의 관음상을 모신 거대한 건물인데, 처음 들어왔을 때 보타전이 대웅전인 줄 알았다. 보타전 앞에 모여 연등을 마무리하고 행사 종료 후 믹스커피 한 박스씩 나눠주셨다. K-사찰 맥심 믹스커피는 국룰이지.(휴가 마치고 회사에 들고 가서 믹스 커피를 좋아하는 팀원들에게 나눠줬다.)






14. 담소

모든 행사와 일정이 끝나고, 저녁 어스름에 잠긴 낙산사를 통행이 금지되는 시간까지 다니며 촬영하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휴식형이라 묵언을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씻고 잠자리에 모인 남자 참가자들끼리 자기 전까지 담소를 나눴다. 남자 참가자는 나를 포함해 총 4명. 팬데믹으로 해외여행이 불가능해서 국내 신혼여행을 다니는 신혼부부(남편), 세브란스 신입생 2명이다. 공교롭게도 신혼부부였던 분도 연세대 출신으로 현재 여의도 증권사에서 재직 중이라고 했다. 나 빼고 다 연대생… 이면서 동시에 무교다.


세브란스 신입생들은 분명 학기 중일 텐데 어떻게 템플스테이 왔냐고 물어봤더니 수업시간에 laptop으로 출결 후 접속만 시켜놓고 여행을 왔다고 했다. 우리나라 의학계가 이렇게 밝을 수가 없다…… 하하하. 2명의 학생은 세브란스 새내기 여학우(동기) 2명과 함께 왔는데, 넷이서 동해안을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중 이번 양양 낙산사 템플스테이가 여행의 마지막 코스라고 한다. 그래서 돌아갈 때 낙산터미널에서 나와 같은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나도 저런 치기와 젊음을 누렸어야 했는데 쓸데없이 범생이로 산 것 같아 조금은 후회스러웠다. 뭐 그땐 Zoom 원격수업도 없었으니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우리는 최근 화제가 되었던 가상화폐 자산 이야기부터 새내기 의대생의 설렘, 신혼부부가 템플스테이로 오게 된 까닭과 같은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로 늦은 밤을 밝혔다. 이런 새로운 만남도 이번 템플스테이에 기대하던 것 중 하나였는데, 다들 거리낌 없이 대화에 참여해서 남성 숙소가 야밤 경내에서 조금은 시끄러웠을지도 몰랐을 초여름 밤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음 날 일출을 보러 나갈 때 서로 깨워주기로 하고 *알람시계를 맞춘 뒤 잠에 들었다. (*입소 절차 당시 핸드폰을 모두 수거했기 때문에 새벽에 일어날 수 있도록 숙소에 알람시계가 비치되어 있다.)


하지만 난 밤새 귓가에 앵앵거리며 날아다니는 산(山)모기에 고통받아 잠 한숨 자지 못했다….


모기는 못 잡았다…ㅠ

(불을 켤 수 없어 잡을 수 없었다.)






15. 일출

04:30 기상, 다 같이 후딱 일어나서 잠자리를 정리하고 숙소를 나섰다. 알람이 있었지만 굳이 울리기 전에 다들 침상을 털고 일어났다. 각자 가고 싶은 곳이 달라 서로의 목적지로 향했다. 경내에 중간중간 가로등 조명이 있지만 그래도 아직 어두컴컴했다. 잘 보이지도 않는, 다른 누군가에겐 다소 두려움을 심어줄 수 있는 새까만 어둠 속에 잠긴 사천왕문을 지나, 어제 밝혀놓은 연등 해안 길을 지나, 새벽 예불이 한창 진행되는 보타전을 지나, 해수관음상으로 가장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청명했던 낮과 다른, 낙산에서 독자적으로 분리된 공간감을 연출할 것이라는 묘한 기대감이 있었을까. 실제로 일출이 진행되고 있는 해수관음상의 공간은 달랐다. 낮과는 확연히 다른 인상을 주었다. 적절한 어휘인지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범우주적인 톤앤매너를 지닌다고 해야 하나. 수평선 끝에서부터 불타오르는 듯한 일출이 종말관을 보여주는 것 같으면서도 무겁게 내려앉은 찬 공기에 넓은 동해안 보랏빛 새벽하늘이 개벽을 맞이한 우주에 둥둥 떠있는 듯한, 이율배반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 공간이 낙산사 일원에서 가장 크고 넓고 광활해서 개인적으로 독특한 모종의 해방감을 주기 때문에 더 끌렸던 것이 아닐까 싶다.


새벽 어스름의 해수관음상 © 2021. 겁쟁이 선비. All right reserved.


그 공간에 더 체류하고 싶었지만 일출에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기에 바로 해수관음상에서 의상대로 뛰어갔다. 먼 거리는 아니지만 자칫 놓칠 수 있을 수도 있었고, 길이 아직은 밝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혹시 헷갈려서 길을 잘못들 수 있을까 해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의상대에 도착하니 세브란스 신입생 4명이 의상대 정자에서 일출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핸드폰은 낙산사에 입소하면서 모두 수거한 상태이고, 템플스테이 휴식형 신청할 때 촬영을 희망하면 개인 소장 카메라를 준비해 오라는 안내가 있었기 때문에 나를 포함한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은 모두 카메라를 들고 왔다.)


세브란스 새내기 동기 4인방 © 2021. 겁쟁이 선비. All right reserved.


새벽부터 바다에 구름이 많이 껴서 해를 제대로 볼 수는 있을까 싶었는데, 그 해운(海雲) 사이로 비집고 해가 떠올라서 웅장한 동해의 원대한 일출을 2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부족함 없이 볼 수 있었다. 셔터를 시종일관 눌렀지만 역시 눈으로 담는 게 최고인 듯 싶어(사실 사진 실력이 형편없어 그렇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잠시 일출을 열심히 망막에 기록했다. 솔직히 여기서 이 광경을 매일같이 보면서 좌선수행하는데 '오히려 깨달음을 얻지 못 하는게 더 이상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상대는 그런 장소였다. 아니 더 나아가,


- 여기서 공부하면 공부 잘 되겠다 하는 장소

- 윌리엄 S. 클라크의 "Boys, be ambitious!"라는 격언이 잘 어울리는 장소

- 여기서 야망을 가지면 성취욕이 불타오를 것 같은 장소

- 저 먼 동해 끝에서 의상을 수호했던, 용이 된 선묘가 의상을 기억하며 되돌아올 것 같은 장소

- 그 옛날 의상이 기나긴 기도 끝에 친견했던 관세음보살이 다시금 나타날 것 같은 장소


의상대는 그런 장소였다.


의상대 일출의 짜릿함은 형언하기 힘들다 © 2021. 겁쟁이 선비. All right reserved.


그렇게 의상대에서의 짧지 않은 일출을 유람하고 말 못 할 숙연함에 젖어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보게 된 소원지가 된통 산통을 깨 놨다. 보통 재물과 관련된 소원, 학업과 관련된 소원이 대부분의 포션을 차지해야 하는 소원지 사이사이로 (초딩으로 대표되는) K-잼민이들이 적어놓은 유쾌한 소원지들이 위치해 있었고, 킹받게도(어쩔 수 없이) 그 소원지에 눈길을 빼앗겼다. 그래서 아침 먹으러 가는 길에 그 기나긴 길에 걸어놓은 소원지를 하나하나 들여다 보게 만든 웃음벨 소원지를 몇 가지 소개한다.


아이즈원은 재결합하지 않아. 아스날도 아직 우승 못하고 있어. © 2021. 겁쟁이 선비. All right reserved.


2021년을 강타한 무야호와 가상화폐 비트코인 © 2021. 겁쟁이 선비. All right reserved.






16. 맺음

아침 식사 후 쉬었다가 연꽃 만들기 체험.(주름진 종이로 연잎을 만들어 붙이는 연꽃 연등이다. 내가 연꽃을 너무 못 만들어서 사진으로 남기지 않았다. 나는 진짜 손재주가 없나 보다.) 또다시 잠시 쉬었다가 템플스테이 담당 스님과 차담, 참가자 각자의 체험후기 공유, 기념품 수령, 옷 반납 등 퇴소 절차 후 참여했던 분들과 인사하고 헤어졌다. 유교경과 열반경에서 비롯된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처럼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이다. 1박 2일 짧은 만남이었기에 여운도 길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도 조심히! '조고각하' © 2021. 겁쟁이 선비. All right reserved.


그렇게 거창한 듯, 거창하지 않은 듯 휴가 내 템플스테이에서 추구했던 소기의 목표는 달성했다.


“쉼”


낙산사 템플스테이는 내가 제시했으면서 목표로 삼았던 명제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자연에 인접한 장소에서 핸드폰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로 새로운 경험을 제공받았다.


처음으로 가 본 해안가 사찰과 1박 2일 템플스테이가 제공한 팬데믹 특수 상황 속 새로운 만남의 경험이 인생에 있어서 큰 가치를 지니는 것은 어렵겠지만, 지친 스스로를 돌아보고 쉼에 다다르도록 내면을 이끌었던 원동력은 이후의 삶에도 큰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템플스테이를 정리하고 낙산사를 마지막으로 둘러보는 길에 의상대사 기념관에 들러 2005년 산불로 녹아내린 동종을 보았다. 지칠 대로 지쳐버린 나의 회환과 아픔을 완전히 지우는 것은 아직은 어렵겠지. 하지만 쉬어갈 수 있으니까,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받아들인다면 이윽고 복원된 동종처럼, 본래 위치했던 범종루에 다시 걸려 제 소리를 내도록 만드는 나만의 회복탄력성이 갖춰지지 않을까.


다시 가고 싶다, 낙산사 템플스테이.


홍련암 방향에서 바라본 의상대 전경 © 2021. 겁쟁이 선비. All right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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