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진로, 미래, 그리고 사람에 대한 고민
25살, 서울 내 10대 대학 공대 재학 중, 4점대 학점, 학생회/봉사 단체 등의 경험 다수.
이력서에 적힐 내 포트폴리오다. 내 주변인들은 이런 나에게 넌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냐고 물어보곤 한다. 그러나 나에게 이 이력들은 모두 의미가 크지 않다. 물론 그 속에서 배운 점도 많고,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던 소중한 경험들이지만, 이 글의 제목인 '사람은 어째서 태어났는가',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나는 어떤 것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까' 등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큰 시사점을 가지지 않는다.
내 인생을 간략히 요약해 보겠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돈 때문에 무언갈 못 해본 적은 없었다. 최상위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했다. 마음 맞는 소중한 친구들을 찾았다. 공부를 곧잘 한 덕에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대학의 간판 학과에 입학했다. 생각보다 대학 공부도 할만했다. 그래서 좋은 학점을 받았고... 등.
이게 내 자랑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누군가는 나의 이런 얘기가 듣기 거북할 수도, 온실 속의 화초가 철없는 소리를 내뱉는다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내 삶이 충만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내 가족들은 모두 바빠 외로운 일상이었다. 공부를 곧잘 하는 편이었지만, 목표가 없이 방황하던 나는 인생에 많은 회의감을 느꼈다. 남들이 알아주는 학교에 입학했지만, 나는 엔지니어가 되고 싶은 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 좋은 학점을 갖고 있지만, 정말 흥미롭고 스스로를 온전히 던질 수 있을만한 과목 또한 찾지 못했다.
내 인생은 '애매함'의 연속이었다. 어느 곳에서도 감히 '내가 최고다'라고 외칠만한 분야는 없었다. 나의 흥미와 적성을 싸그리 무시한 채, 그저 남들에 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달려왔다. 나는 시선이라는 상자에 갇혀 스스로를 재단하며 살아온 것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아라'는 말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너무나 남의 시선에 의존하며 살아왔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홀로 설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외로움으로 가득 찼던 유년기와 학창 시절을 거친 결과, 나는 성인이 된 지금도 혼자 있을 수 있는 용기가 없다. 스스로 온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과의 행복도, 자아실현의 행복도, 인생의 행복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행복만을 느낄 수 있는, 반쪽짜리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외로움을 스스로 극복할 수 없고, 고민으로 점철된 일상을 보내는 그런 사람. 이러한 경험은 내 가치관에 너무나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나는 무신론자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의 삶에 분명한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목적이 거창할 필요도, 대단한 무언가를 함의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령 내 가족, 소중한 사람들과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나의 꿈도 내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의 내 또래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면, 나와 비슷한 대답이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는 돈과 명예, 성공에 대해 얘기하곤 한다. 물론 그들을 비난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 또한 존중받아야 할 삶의 목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를 뛰어넘은 보다 궁극적인 이야기다.
돈을 예시로 들어보자. 우리는 모두 부자가 되고 싶다. 가난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부자가 되고 싶은 걸까? '행복하기 위해서'. 이것이 옳은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소득과 행복은 어느 정도의 비례 관계를 갖는다고 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어느 정도의 비례'이다. 그 연구에 따르면, 소득과 행복은 비례 관계를 가지다가 특정 소득을 넘는 순간부터는 서로 무관해진다고 한다. 즉, 1년에 천만 원을 버는 사람과 1년에 1억을 버는 사람은 삶의 행복도에 차이를 보이지만, 1년에 1억을 버는 사람과 1년에 2억을 버는 사람은 차이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돈은 행복에 있어 필요한 요소 중에 하나지만, 절대적인 변수는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돈을 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유한하다. 자산이 1조여도 죽을 때 들고 갈 수는 없다. 그런데 요즘의 우리는 참으로 기이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하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돈을 버는 삶. 워라밸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가 이뤄지기 시작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생각 또한 내가 아직 제대로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은 철부지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잠시 꺼내보려 한다.
우리 부모님은 항상 바쁘셨다. 어머니는 월-금 8시 반에 출근하셔서 8시-9시 사이에 집에 돌아오시곤 하였다. 토요일에도 오전에는 항상 출근을 하셨다. 아버지는 지방으로 자주 발령을 받으셔서 초등학교 고학년 이후론 평일에 집에 계신 적이 없다. 그리고 그 집엔 항상 내가 있었다. 우리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치열하게 삶을 영위하셨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난 오히려 우리 부모님을 존경한다. 한 분야의 정점에 도달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존경을 부모님께도 느낀다.
내 행복은 둘째 치더라도, 우리 부모님은 행복하셨을까? 외로워하는 아들을 보면서, 무언갈 해주고 싶어도 너무나 지쳐버려서 집에 돌아와 잠만 자는 본인들의 인생이 정말로 행복하셨을까. 그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때부터 내가 오늘의 주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우린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
우리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
스스로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좇을 때 행복의 실마리에 다가설 수 있다. 이게 내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이다. 추구하고자 하는 것에는 다양한 것이 있을 수 있다. 어느 한 분야의 정점이 되고자 하는 것도, 돈을 많이 벌고자 하는 것도, 명예를 추구하는 것도, 가족과의 행복한 일상을 추구하는 것도 모두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25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내 사람들(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 이 것이 나의 첫 번째 가치이다. 그리고 두 번째, 나는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듣고 변화하는 것을 보고 싶다. 어린 시절, 나 역시 막연하게 성공한 나의 모습을 떠올려본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분야는 달랐다. 수의사가 되어 성공한 나의 모습, 과학자가 되어 성공한 나의 모습, 대통령이 되어 성공한 나의 모습.
그러나 그 끝은 항상, 내가 어딘가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남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 내 상상들의 종착역이었다. 학원 선생 노릇을 하며 즐거웠던 것도, 후배들을 챙겨줬던 것도, 고등학교에 찾아가 내 전공을 소개해주던 것들도 모두 이 생각의 연장선이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사회에 메시지를 던질 것이다. 오늘부터. 지금의 이 글이 그 첫 발걸음이다. 내가 메시지를 던지는 방식이 글일지, 영상일지, 아니면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하는 새로운 방법일지는 모르겠다. 내 꿈을 찾은 오늘부터, 나는 끊임없이 메시지를 던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