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머니는 항상 바쁘셨다. 직장이 멀리 위치한 관계로 차를 타고 이동해도 1시간,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거의 2시간 가까이 걸렸다. 내가 7살에서 8살로 넘어가던 그 쯔음부터 약 18년간 우리 어머니는 그곳으로 출퇴근을 하셨다. 어린 시절에는 차를 줄곧 이용하셔서 출퇴근을 하셨지만, 근 몇 년 간은 운전이 귀찮다고 하셔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을 하신다. 그래서 요즘엔 아무리 늦어도 7시 30분에는 집을 나서곤 하신다.
어린 시절에도 나는 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보단, 외할머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아버지께선 직장이 타 지방에 있어 그 곳에 계시다 주말에만 올라오셨고, 어머니는 출근 전 잠깐, 퇴근 후 늦은 저녁에서야 만날 수 있었다. 학창 시절 내 식사는 거의 항상 할머니께서 차려주시곤 했다. 덕분에 내 입맛이 상당히 토종적으로 변하였다. 사실 나는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이 더 좋았다. 우리 어머니는 요리를 참 못하셨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는 할머니께서 주로 시골에 계셨고, 간간히 올라오셔서 손주의 안부를 확인하곤 하셨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시기였나, 그 쯤에 할머니는 완전히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못내 아쉬웠지만, 더 할머니를 귀찮게 만들어드릴 순 없었다.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께선 나의 식사를 많이 걱정하셨다. 체형이 원체 말라서 더 했을까? 요리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바쁜 일상 중에 매 끼니를 차려먹기엔 나의 체력도, 시간도 여의치 않을 것 같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께선 내게 가격 생각하지 말고 맛있는 밥을 사먹으라고 내게 카드를 주셨다.
참 신났었다. 한 달 용돈이 10만원인 고등학생의 신분으로는 사실상 무제한의 식대가 주어진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매일 맛있는 식당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메뉴를 도전해보는 것은 내 바쁜 일상의 몇 안 되는 힐링 시간이었다. 아마 이때 쯤부터 맛집을 찾아다니고 음식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취미가 됐던 것 같다.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 카드는 반납했지만, 내 식사는 여전히 주로 밖에서 해결했다. 대학생이 되고 난 후로는 시공간적 자유가 더욱 생겨 내 맛집 리스트는 전국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일부 경제적 자유까지...) 요리야 할 순 있었지만, 이미 습관이 베어버린 탓이었을까, 선뜻 조리 기구에 손이 가질 않았다.
나야 별 생각이 없었지만, 어머니에게 내 모습이 조금 안쓰럽게 비춰졌던 것 같다. 자식에게 따뜻한 밥 한 끼 해먹이는게 부모로서의 행복 중 하나이기 때문일까. 밖에서 조미료에 절여진 음식들을 먹는 자식에게 미안함을 느끼셨던걸까. 어느 날부터 어머니는 아침을 해놓고 출근하셨다. 7시 반이면 출발해야하는 분이 이런저런 반찬들을 몇가지 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가시곤 했다. 못해도 6시에는 부지런히 움직이시는 듯 했다.
'엄마, 밥 안해도 돼요. 알아서 먹고 다닐게요.'
어머니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침을 잘 안 먹기도 하지만, 다 큰 아들 때문에 일찍 일어나셔서 고생하셔야한다는게 내겐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내 말을 듣는둥, 마는둥 항상 무언갈 차려놓고 나가셨다. 그러면 나는 그 정성이 미안해서라도 꼭 아침밥을 다 먹고 나갔다.
언젠가 부모님과 술을 마시다 그런 이야기가 나온 적 있다. 어린 시절의 나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대화도 자주 못 나누고, 아침마다 밥을 차려주지도, 다른 엄마들처럼 매일 집에 있어주지도 못해서 너무 미안하다고.
부모님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게 아쉬운건 나 역시 사실이지만, 단 한 번도 그로 인해 부모님을 원망해본 적은 없었다. 덕분에 식대 무제한의 카드를 갖고 자칭 미식가가 될 수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부모님에게는 그게 항상 못내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참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
'뭐 먹고 싶어?'
'엄마, 진짜 괜찮아. 피곤할텐데 뭘 굳이 하려고 해요. 그냥 1시간이라도 더 자고 출근해.'
'그래 알았어.'
'맛있게 먹고, 오늘도 Have a good day! -엄마'
짧은 쪽지 한 장과 감자채볶음, 참치조림. 어제의 아침 메뉴였다. 엄마와 나의 이 오묘한 불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