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를 시작한 지 언 17년
돌이켜 보면 어느새 고향 떠나 자취를 시작한 지 17년이 되었다.
처음 했던 자취는 고3 겨울방학 무렵 서울에 올라가 마장동에서 냉동 탑차 조립 부사수를 하면서 시작됐다. 회사 사무실 한편에 다락방처럼 부스를 만들었는데, 겨우 성인 두 사람이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잠만 잘 수 있는 공간이었다. 마치 관짝 속에 있는 시체가 된 듯한 기분에 나의 첫 자취는 그렇게 우울하게 시작했다.
전역 후에는 내가 배운 기술을 살리기 위해 줄곧 타지 생활을 했어야만 했다.
본고장인 대전에서는 내가 가진 기술과 실력으론 일 자리가 턱없이 부족했고 늘 한계에 부닥쳐야 했다. 더군다나 당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기 일쑤였고, 어떻게 해서든 어리숙한 나를 이용해 자신들의 영리를 꾀하는 자들이 늘 주변에 도사렸다. 그렇게 더 이상 이곳에선 제 갈 길을 찾지 못할 거란 생각에 대전만이 아닌 전국구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발품 팔아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수소문 끝에 결국 나 같은 초보도 받아준다는 회사들을 여럿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너머 너머 소개받고 시작한 타지서의 첫 직장 생활은 전남 장성이었다. 꽤 규모가 있던 회사이기에 직원 전용 아파트도 운용하던 회사였다.
말이 좋아 아파트지 80년도 초에 지어진 낡은 빌라를 간신히 유지 보수하며 쓰고 있던 터라 군데군데 검지와 엄지가 들어갈 만한 금이 가 있었고 겨울에는 쉽게 동파가 나는 등, 그 외에도 여럿 하자로 인해 노심초사하면서 살았던 곳이다. 그래도 젊음이 무기라고, 겨울철 집안을 매섭게 맴도는 외풍으로 거실 식탁에 놓인 바나나가 딱딱하게 얼 정도의 추위에도 겨우 옷 몇 겹 껴입으며 겨울을 버텼고. 여름에는 에어컨 없이 찌는듯한 더위는 물론이고, 장마철에 내리는 비로 천장에선 어디서 새는지 모를 빗물 때문에 집안 곳곳에 세숫대야와 바가지, 깡통들로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 가며 곰팡내 풀풀 풍기는 방 안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가며 개의치 않고 넘겼다. 그렇게 1년 가까이 그곳을 지내며 나만의 자취 철학(?)에 꽤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자취 철학엔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잠만 잘 수 있고 밥 먹을 돈만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겠구나 라는 논조가 있다.
그 후로 여러 직장들을 옮겨 다니며 자취생활을 할 때마다, 지금으로서 생각하기에 그 개똥 같은 자취 철학으로 인해 내 방은 늘 개판이었다.
훗날 동료가 내 방을 둘러보며 말하길.
“야, 너 이렇게 살면 병 걸려. 목은 안 아프냐? 기침은 안 하고? 대단하네...”
아마 집 안 구석구석 쌓인 쓰레기와 먼저 더미들을 바라보며 말한 것이리라.
그래도 나는 별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엉망으로 하고 살아도 나에겐 별다른 영향이 없을 거란 생각에 말이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며 어느 순간 집안이 엉망이면 내 멘탈도 엉망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그리고 그 말의 실체를 몸소 겪으면서 미약하게나마 조금씩 치우는 습관을 기르기 시작했다. 우선 쌓이는 쓰레기는 제때제때 버리는 것을 시작으로, 화장실 청소를 기점으로 주변을 닦고 쓸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집은 짐승이 사는 우리가 아닌 사람 사는 진짜 집으로 변모하면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집안 정리를 하면서 정말 많은 것을 느꼈지만 다른 무엇보다 더 크게 느낀 건 나와 동생을 키우신 우리 할머니의 노고였다.
우리 집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갑작스레 어려워지면서 어머니가 집을 나가셨고, 그때부터 나와 동생은 할머니의 슬하에서 자라왔다.
우리 할머니는 원체 깔끔하고 원칙 주위적인 분이라 무엇을 해도 허투루 하거나 대충 넘기려는 것엔 불같이 화를 내셨다. 그런 할머니 덕분에 우리 집은 늘 깔끔 그 자체였다. 바닥은 파리가 미끄러지듯 했으며, 구석구석 그 어디에도 먼지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요리 실력까지 엄청나셨기에 우리 집 집밥은 절대 맛이 없을 리가 없었다. 덕분에 당시 어리던 우리로선 어머니의 큰 빈자리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런 할머니의 슬하에 자라온 나였기에 다른 집의 부모님이나 어른들 또한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그들에게 우리 할머니의 깔끔함과 완벽함을 설명할 때면 정작 다수가 자신들의 부모님과 어른들은 꼭 그렇지 않다는 답변을 들었어야 했다. 그리고 오늘날에서야 직접 내가 사는 집을 청소를 하게 되면서, 청소가 이렇게 힘들고 대단한 것이라곤 생각지 못하고 살았던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할머니는 당신이 어지럽힌 것뿐만 아닌 당신의 자식과 손주가 어지럽힌 곳마저 더듬고 어루만져 케어하셨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할머니에게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깔끔하신 우리 할머니.
그런 할머니에게 뒤늦게나마 우리 할머니에게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내가 살아갈 수 있음은 우리 할머니 덕택인 걸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다. 앞으로도 할머니를 생각해서 깔끔하고 부끄럼 없이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오늘이다.
사랑합니다.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