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흐르는 강물처럼 주르륵 써지는 글 있는가 반면, 울퉁불퉁 도로 위를 굴러가는 구슬처럼 마냥 매끄럽게 글들이 굴러가질 않는다. 그렇게 쓰고 지우기를 번복하니 어느새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분명 7시에 시작한 글쓰기가 세 시간이 넘도록 결판나지 않고 있다. 보통은 두 시간 정도 골조를 잡고 한 시간 정도 검수한 뒤 블로그와 브런치 올리든 아님 다시금 묵혀두든 결정을 내린 것만, 오늘은 그게 잘 되질 않는다.
손으로 턱을 괴고 모니터 액정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손끝으로 만져지는 꺼끌꺼끌한 턱수염이 괜스레 거슬린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하며 나름 깔끔히 면도했다고 생각했거늘, 복병처럼 남아있는 턱수염 잔해는 아침의 면도가 완벽하지 않음에 영 꺼림칙했다. 그러다 답답한 마음에 환기라도 해야겠다 싶어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봤다. 밖은 제법 우중충했다. 하늘은 잿빛으로 가득했고, 곧 비라도 내릴 듯 습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하얀 눈송이가 솔솔 떨어지기 시작한다. 올해 첫눈이다.
지금처럼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 봐왔던 첫눈의 대부분은, 매연과 먼지 냄새 가득한 건설 현장에서 맞이해야만 했었다. 그해 처음 내리는 첫눈을 바라보며 감성에 젖을 법도 하다만, 건설 현장에서는 그런 낭만 따위에 취해 있을 겨를이 없었다. 일단, 한번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외적인 모든 공정들은 중단된다. 눈이 내리는 동안 현장 내외로 가용 가능한 인력들이 최대한 모여 현장의 모든 도로에 염화칼슘을 뿌려대며 제설하기 바쁘다. 무엇보다 더욱 치명적인 건 눈이 다 내리고 난 뒤로도 눈이 녹을 때까지 일을 못한다는 점이다.
이는 굴삭기 기사인 나에게 월 매출에 제법 큰 타격을 안겨 준다.
한 달에 못해도 10일 정도 일을 해야 겨우 제 입에 풀칠하며 동시에 장비 유지비를 남길 수 있다. 하지만 추운 겨울에는 안 그래도 장비업계 입장에선 ‘비성수기’인지라 일거리도 잘 없거니와, 더군다나 비나 눈이 내리게 되면 질척질척 얼어버리는 땅 때문에 그마저 있던 일거리들도 다음 달로 미뤄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니 월 10회는 고사하고 4~5회만 나갈 수만 있다면 감지덕지였다.
이렇듯 나에게 있어 첫눈은 곧 생존을 야기하는 신호탄과 같았다.
겨울은 누가 먼저 일거리를 채가느냐의 기사들의 총성 없는 전쟁 시즌이다. 봄부터 늦가을까지 많은 일을 맡아온 사람들은 그야말로 ‘한철장사’를 했기 때문에 겨울이 오더라도 그리 큰 타격을 입지 않지만, 당시 나처럼 초짜 기사 들은 부족한 실력에 성수기에도 [3월~10월] 일거리를 풍족하게 받지 못했고, 더군다나 초짜 기사들에게 일거리가 없는 겨우내 에 다른 실력 좋은 기사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는 건 사자와 호랑이 사이에 쭈그리고 있는 하이에나가 떨어진 썩은 고기를 찾는 것 마냥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그 후론 눈을 ‘쓰레기’라고 지칭해 내 인생에서 가장 싫은 것 중 하나로 자리하게 했다.
오늘날
오랜만에 밖으로 나가 차 본 닛위로 쌓인 눈에 손바닥을 올려봤다.
차가울 거란 예상과 달리 손에 느껴지는 새하얀 솜이불은 왠지 모를 따뜻함과 포근함이 만져졌다. 하늘을 보니 한 알 한 알 가냘프게 내리던 눈은 어느새 뻥튀기 같은 크기의 함박눈이 되어 내리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순식간에 변화하는 눈송이 크기에 나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그렇게 내리는 눈은 얼마 되지 않아 온통 주변을 새하얗게 덮어주고 있었다. 때마침 집 뒤에 초등학교가 점심시간이 되어서인지, 운동장에선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소리와 눈 내리는 설경은 때 이른 크리스마스 느낌을 자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