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선생 Aug 20. 2019

돌반지 레이스 (상)


 이게 다 돌반지 때문이다. 처음엔 그저 H에게 돌반지를 전해주고 올 목적이었다. 하지만 H는 직장인이자 첫 돌 된 아이의 아빠였다. 퇴근 시간이 되기 바쁘게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주말이면 지난 5일간 육아에 지친 아내의 한숨을 돌려줘야 할 의무를 가진, 즉 주말 육아를 전담하는, 갓 돌 된 애가 딸린 유부남이었다. 아무리 선의의 선물을 전해줄 목적이었을 지라도, H에겐 만남 자체가 부담될까 싶은 미안한 마음이 살짝 앞서기도 했다.

 그렇게 졸지에 일요일 아침 ‘러닝 약속’이 잡혀 버렸다. H의 유일한 주말 자유시간인 러닝 타임에 내가 잠시만 끼어들 목적이었다. H 입장에선 어차피 달릴 거 누구랑 같이 달릴 수 있으니 심심하지 않아 좋을 테고 기록 앞당기기에도 나쁘지 않은 러닝 메이트 역시 생겨난 거다. (난 육군 훈련소 체력 테스트 오래 달리기 부문 1등이란 공인 기록 보유자다. 전화 한 통의 포상이 걸린 나름 메이저 대회였다.) 나 역시 허구한 날 헬스장만 가는 운동 루틴에 변화를 줄 수도 있고 만나서 수다만 떠는 나와 H의 만남 루틴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보통 한번 뛸 때 얼마나 뛰냐?”

 “음... 보통 5킬로는 무조건 뛰려고 하죠.”

 (5킬로? 오래 달리기 할 때 운동장이나 연병장을 몇 바퀴 돌았었더라? 한 바퀴를 크게 잡아도 300미터. 10바퀴라고 해봐야 3킬로인데. 아니지. 10바퀴까지는 안 뛰었던 거 같은데?)  

 “5킬로? 그럼 5킬로를 몇 분 만에 뛰는데?”

 “예전에 한창 기록 좋을 때는 더 빨랐는데.. 요즘은 한 20분 정도면 뛰어요.”

 (5킬로를 20분? 그냥 단순 계산하면 10킬로에 40분, 40 킬로면 2시간 40분? 마라톤 풀코스인 42.195킬로라면 대충 3시간? 미친. 이런 말 같은 놈을 봤나)

 H 말로는 본인이 달리는 거리나 기록은 극히 평범한 수준이란다. 러닝을 취미로 하는 요즘 30대 직장인들 자기보다 훨씬 더 빠르고 오래 달린다고. 뭐라? 평범? 언제 우리나라가 이렇게 다이내믹 코리아가 되었지? 어찌 됐든 러닝을 같이 하자는 나의 제안에 H는 조금 들떠 보였다. 덩달아 내 마음속의 부담까지 커갔다. 들떠 있는 H의 주말 레이스에 민폐가 되면 안 되는데. 나를 러닝 메이트 삼아 기록을 당기는 것까진 무리여도, H가 퍼진 나를 끌고 가는 추한 상황만큼은 정말 피하고 싶었다.




 러닝 약속이 잡힌 일요일 아침을 하루 앞둔 토요일, 와이프와 함께 간 헬스장에서 어쩐 일로 나는 러닝 머신 위에 올라탔다.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5킬로를 처음 접한 내 허벅지가 놀랠 수 있으니. 하루 전날, 5킬로의 절반인 2.5킬로만 연습 삼아 달려보기로 했다.

 ‘보자. 5킬로를 20분 만에 완주해야 되니깐... 2.5 킬로면 10분.. 그럼 속도를 얼마에 놓고 뛰어야 되는 거지?’

 산술적으로 시속 14-15킬로 정도를 유지해야 했다. 아니 이게 대체 제 정신으로 가능한 일인가? 심지어 헬스장엘 가더라도 러닝머신 위에는 가뭄에 콩나듯 올라가던 나였다. 가뭄 속에 피어나는 콩같던 나의 레이스 역시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1) 2분간 6킬로. 무릎과 심장이 놀래 수 있으니 일단 쉬엄쉬엄.

 2) 5분간 10킬로. 전력(?) 질주를 통해 폐 속부터 끓어오르는 피 섞인 침 맛 살짝 보기

 3) 마지막 3분 6킬로. 준비운동 만큼이나 마무리 운동 역시 중요하다는 명분 삼아 다시 설렁설렁.


 근데 시속 14-15킬로 10분을 어떻게 달리냐고 대체?

 죽음의 문턱을 절반 정도 둘러 본 10분간의 레이스가 끝이 났다. 찬물이 필요했다. 목을 적실 물도 물이지만 몸에 끼얹을 찬물이 간절했다. 샤워를 마치고도 시뻘겋다 못해 새카매진 내 낯빛은 진정되지 않았다. 피맛 섞인 침은 당연하고 위액까지 역류해서 올라오는 것 같았다. 목구멍이 아주 따끈따끈했다. 머리 말릴 드라이기를 들 힘 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운동을 마치고 와이프와 약속된 쇼핑몰에 들렀다. 부부가 쇼핑할때 주차장에서 기다린다는 남편들의 처지에 처음 공감했다. 제대로 걸음조차 뗄 수가 없었으니깐. 신이 난 와이프를 앞세운 뒤 나는 계속 앉을 곳만 찾아 헤맸다. 그날따라 예쁜 옷 눈에 들어올리 없었다. 다 고만고만한 디자인 일색이었다. 결혼하고 외모 꾸미기에 대해 시들해진 걸까? 단지 기분 탓인가? 아니. 백퍼 이 놈의 러닝 탓일 게다.


 ‘우리 내일 오전에 러닝 하는 거 맞지?’  


(제발 안된다고 대답해줘. 갑자기 애가 아빠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고. 제발)


 메세지 옆의 1 이 금세 사라졌다


 ‘네 행님! 한강을 갈까요? 아님 평소에 제가 뛰는 연트럴 파크를 갈까요?’


 (들떠있다. 꽤나 신나 보인다.)  


 답답한 헬스장 실내, 모터의 힘에 의지한 러닝머신 위에서 뛴 탓에 피로를 더 느끼게 된 것이라 믿어본다. 사람의 신체는 본디 자연 상태에서 살아가는데 최적화되어 있는 거라는 진화 원리를 붙잡아 본다. 내일은 다를거라고. 한강 물줄기가 됐건, 연트럴 파크의 수많은 나무들이 됐건, 자연을 바라보며 뛴다면 훨씬 덜 힘들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져본다. 역시 사람이 절박해질때면, 예수건 부처건 신앙에 기대고 싶어 지나 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