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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그린 Dec 31. 2022

서로를 돌본다는 것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설모에게.


이틀이나 늦게 편지를 보내. 기다려줘서 고마워. 어느새 연말이야. 나는 한 해를 마칠 때마다 나만의 시상식을 . 올해의 먹거리, 올해의 책, 올해의 영화 등등. 그런데 최근에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서 깜빡 잊고 지나갈 뻔했지 뭐야. 부랴부랴 사진첩을 들여다봤어. 올해는 너로 가득하더라. 그래서 특별히 <올해의 친구 부문>을 만들었어. 수상을 축하해.


는 엄마의 집으로 이사를 했어. 한동안 여기서 머물 거야. 오랜만에 만난 엄마는 말을 아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어. 용달을 부르지 않고 굳이 당신의 차로 짐을 나르는 것이 지겨워 푸념을 늘어놓아도 대답이 없었고, 당신의 곁을 떠나 먼 육지로 가겠다는 말에 서운한 기색을 내뱉지 않았어. 나는 그 침묵이 낯설고 슬펐어.


마는 갱년기 때문에 금방 얼굴이 빨개지고는 했어. 그러다 문득 내 우울증에 처방된 수면제를 나눠줄 수 있느냐고 물었어. 하루라도 편안히 자보고 싶다며. 나는 엄마에게 나눠줄 약이 없다는 게 미안했어. 엄마가 가여워서 차라리 내게 잔소리를 하거나 윽박질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이사를 마치자 엄마는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어. 그런데 혼자 늦은 시간에 운전하는 게 무섭다고 해서 내가 함께 갔지. 엄마의 오랜 친구들을 만났어. 그동안 나의 보잘것없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자리를 피었는데 오늘만은 쑥스러움을 참기로 했지. 엄마의 친구들은 날 보자마자 한껏 안아주었어. 내게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를 묻기보다는 자기들의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어. 그게 참 편하고 좋았어.


그 시간 속에서 엄마는 즐겁고 건강해 보였어. 여전히 얼굴은 빨개졌지만 말이야. 가 돌보지 못하는 엄마의 마음을 친구들이 보살펴준다고 생각했어. 아줌마들의 끝없는 수다를 들으며 문득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떠올렸어. 이 영화는 서로를 돌봐주는 우정에 대한 이야기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는 액자식 구성으로 진행 돼. 갱년기를 겪고 있는 여성 에블린은 남편의 숙모를 뵈러 양로원에 찾아가. 하지만 문전박대를 당하지. 숙모를 피해 우연히 들어간 휴게실에서 에블린은 80세의 노인 니니를 만나. 니니는 에블린을 붙잡고 갑자기 오래된 이야기를 시작해. 앨라베마주의 휘슬스탑페에 대한 이야기지.


이 카페의 주인장인 잇지는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어. 특이한 옷차림에 정숙하지 못한 태도. 집안의 골칫거리였지. 유일하게 그녀를 이해해주던 큰오빠는 기차에 깔려 죽어. 잇지와 큰오빠의 연인 루스가 보는 앞에서 말이야. 이후 잇지는 성인이 되어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이를 걱정하던 어머니는 잇지의 상처를 이해해줄 루스를 집으로 초대해.


루스는 잇지에게 끊임없이 다가가. 위험한 곳에서 홀로 낚시를 하거나 야밤에 몰래 기차를 타는 잇지의 곁에 함께 하지. 잇지는 서서히 마음을 열어. 그렇게 두 사람의 우정이 한창 깊어질 무렵 루스는 결혼을 해. 잇지는 상실감을 느끼며 다시는 루스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그러다 몇 년 후 잇지는 우연히 루스를 찾아갔다가 그녀가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걸 알게 돼. 그리고 루스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지. 두 사람은 돈을 빌려서 휘슬스탑카페를 차려. 그 카페는 마을의 중심이자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장소로 거듭 나.


하지만 루스의 남편이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위기를 겪지. 그녀의 남편은 악명 높기로 유명한 KKK. 흑인들을 폭행하고 살해하는 집단이야. 남편은 루스의 아이를 납치하려다가 사망하는데 이로 인해 잇지가 살인 누명을 씌게 돼. 그러나 다행히도 마을 사람들과 교회의 지지로 인해 재판에서 승리하게 되지.


잇지와 루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에블린은 점점 변화해. 처음에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 싫어 거울조차 멀리했는데 어느새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고 표현할 수 있게 돼.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무의미한 노력을 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로 한 거지. 리고 니니에게 함께 살자고 말해. 당신이 나의 마음을 돌봐주었으니 이제 내가 당신을 돌봐주겠다며 말이야.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액자식 구성이야. 현재의 시점에서 에블린과 니니의 서사가 진행되고, 과거의 시점에서 잇지와 루스의 서사가 진행되지. 니니의 구전을 통해 네 사람의 서사는 이어져. 잇지와 루스가 서로에게 구원자가 되어준 것처럼 니니와 에블린은 서로의 구원자가 되어줘. 거의 연대가 현대의 연대로 이어지는 거야. 나는 이 '이어짐'이야말로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주제라고 생각해.


영화를 보는 내내 니니의 정체가 궁금했어. 이 작품은 과거 장면을 그릴 때 니니의 시점으로 그리지도 않고, 니니가 등장하지도 않거든. 다만 니니는 과거의 찬란했던 여성들을 기억하고 오늘날의 후세대 여성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삶을 변화시켜. 니니야말로 '영화'라는 매체의 은유일지도 라.


언제나 그랬듯이 편지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다만 이 영화를 엄마랑 함께 보고 싶네. 엄마와 나의 우정을 기리며 말이야.


추신-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보는 내내 <처음 만나는 자유>가 생각났어. 천 편이 넘는 영화를 본 네가 그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고. 이번 기회에 보길 바래.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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