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그린 Oct 02. 2023

당신도 회피하고 있다면,

<더 웨일> The Whale, 2023

<더 웨일>은 회피하고 있는 어두운 심연으로 들어가 진실함에 닿는 영화다.

출처 : 네이버영화

찰리는 272kg에 육박하는 초고도 비만자다. 보조 기구를 사용해야만 겨우 몸을 일으키고, 온종일 소파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찰리는 에세이 강의를 통해 돈을 번다. 유일한 친구이자 간호사인 리즈가 종종 그의 집을 방문해 돌봐준다. 어느 날, 새 생명선교회의 젊은 교인 토마스가 전도를 하려고 찰리의 집에 나타난다. 찰리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오래전 떠났던 딸 엘리를 만나려고 한다. 영화는 찰리의 집에 리즈, 토마스, 엘리가 방문하며 진행된다.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의 전부를 말해준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비대면 온라인 강의를 진행 중인 모니터가 나온다. 일렬로 정렬된 네모 칸 안에는 학생들의 얼굴이 중계되고 있다. 그 사이 한가운데 시커먼 어둠으로 채워진 네모 칸 하나가 눈에 띈다. 강의를 진행하는 강사 찰리의 화면이고, 그는 카메라가 고장 났다고 거짓말한다. 그 화면의 어둠 속으로 영화는 빨려 들어가고 타이틀 <더 웨일>이 뜬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이 작품이 누군가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첫 장면에 이어서 등장하는 씬은 찰리가 게이 포르노를 보며 자위를 하다가 심장 발작으로 숨을 헐떡이는 장면이다. 그때 토마스가 문을 두드린다.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찰리는 토마스에게 종이를 건네며 읽어달라고 한다. 종이에는 <모비 딕>에 대한 에세이가 적혀있다. 이 에세이는 나중에 밝혀지지만 찰리의 딸 엘리가 적은 것이다. 토마스는 이것을 왜 읽어야 하는지 모르면서 읽어준다. 에세이를 듣는 찰리는 다행히도 안정을 찾는다.


엘리의 에세이는 <더 웨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에세이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선장인 에이해브는 어떤 고래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 그는 평생을 그 고래를 죽이는 데 바친다. 고래는 감정이 없다. 자길 죽이려는 에이해브의 집착도 모른다. 에이해브는 그 고래만 죽이면 삶이 나아지리라 믿는다. 그러나 실상은 그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고, 엘리는 이 책이 너무 슬펐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떠올렸고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더 웨일>에서 ‘고래’는 심연이다. 인물들이 삶을 바쳐 회피해 온 트라우마다. 찰리에게는 사랑을 위해 가족을 버렸지만 끝내 사랑마저 지켜주지 못한 기억이고, 리즈에게는 강압적인 아버지로부터 오빠를 구하지 못했던 기억이다. 토마스에게는 삶의 전부인 교회의 선교비를 훔쳤던 기억이고, 엘리에게는 아버지에게 버려졌던 기억이다. 인물들은 자신들의 고래를 죽이기 위해 폭식하고, 돌보며, 전도하고, 저주한다. 그러면 삶이 나아지리라 믿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의 말대로 회피하는 것은 이들의 삶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행위에 왜 그토록 집착할까. 엘리는 고래 묘사만 잔뜩 있는 챕터가 유독 슬펐다고 한다. 그리고 다행이었다고 말한다. 이 생각의 전복을 통해 영화의 메시지를 헤아려본다. 결국 인간을 이해한다는 건 추함과 아름다움으로만 규정될 수 없는 표면과 복잡한 내면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더 웨일>은 회피 그 자체를 묘사하면서 인간을 이해해 보려고 시도한 영화다. 그 '바라봄'만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찰리가 완벽한 타인이었던 피자 배달부와 눈이 마주치던 순간이다. 피자 배달부는 찰리가 사랑을 선택해서 가족을 버렸던 과거를 모른다. 찰리의 집에 찾아오는 이해관계들을 모른다. 그야말로 완전히 타인이다. 그런 ‘남’과 눈이 마주쳤을 때 찰리는 자신의 지금을 직면한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외면하기 위해 폭식한다. 토할 만큼 먹는다. 자신이 회피해 온 진실을 타인의 눈을 통해 억지로 마주했을 때 더 적극적으로 회피하려는 이 장면이야말로 <더 웨일>에서 가장 가학적이며 솔직한 씬이다.


영화의 제작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 깊다. 작가인 사무엘 D. 헌터는 영어 교사로 일하며 찰리처럼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지도했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진실한 글을 쓰길 요구했다. 그러다 어느 날 한 학생이 이런 문장을 썼다. "흥미진진한 인생이 펼쳐지지 않을 거란 걸 받아들여야 한다." 사무엘 D. 헌터는 학생이 쓴 이 한 문장에서 <더 웨일>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아이디어는 떠올랐지만 글을 쓰면서 몇 번의 실패를 경험했다고 한다. 자신이 학생에게 요구했던 진실함이 빠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게이이자, 고도비만이자, 기독교 학교 출신인 어느 남자. 찰리 캐릭터는 사무엘 D. 헌터를 기반으로 한다.


한 인간이 자신이 회피하던 이야기를 마주하는 진실된 과정에 대해 알게 되자, 나도 내 심연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조금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적어본다. 나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제주도에서 자랐으며 3년째 우울증을 겪고 있다. 나는 여태껏 사귀었던 애인들을 사랑한 적이 없지만 애인이 없는 상태를 불안해한다. 나는 위기에 빠진 공동체에 구원투수로 들어가 일할 때 실존한다고 느낀다. 그러다 결국 나도 이 공동체를 구원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 우울증 증상이 악화된다. 그래서 나는 어느 곳에서건 1년 이상 일해본 적이 없다. 나는 원가족이 해체된 것에 태연한 척 하지만 사실 그것이 내 근원적인 아픔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공동체에 꼭 필요한 인간이고 싶어 하고, 나로 인해 공동체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은 가족에게 느끼는 감정이기도 하다. 애인을 너무 사랑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은 나는 실패했는데 혹여라도 애인이 내 삶의 구원자가 될까 봐서다.


나를 적나라하게 바라보는 것에서 내 주변의 사람들을 솔직하게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각자가 회피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각자에게 진실이란 무엇인지 생각하며 인간을 이해해나가고 싶다.


<더 웨일>은 왓챠, 넷플릭스, 웨이브, 네이버 시리즈온에서 관람할 수 있다.


<더 웨일> The Whale
감독 : 대런 아로노프스키
주연 : 브레든 프레이저
장르 : 드라마
러닝타임 : 117분
연령등급 : 15세 관람가


작가의 이전글 이 세상에는 샘물 같은 어른들이 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