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그린 Oct 19. 2023

신발장 옆자리

열두 살 무렵이었다. 엄마와 동생이랑 어느 거리를 걷고 있었다. 엄마의 한쪽 손에는 짐이 가득 들려 있었고 나머지 한쪽 손은 동생이 잡고 있었다. 거리는 한산했고 햇빛은 뜨거웠다. 나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나도 손 잡고 싶다고!" 엄마는 당황하여 다 큰 애가 뭐 이런 걸로 우냐며 나무랐다. 그래서 더 크게 울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 건 다정이 때문이었다. 월요일 두 시가 되면 나는 옆건물의 유치원으로 네 명의 어린이를 데리러 간다. 수업 종료 종이 울리자마자 어린이들은 뛰어나오며 내 이름을 부른다. 어찌나 목청이 좋은지 우리 학원에 다니지 않는 어린이들도 내 이름을 외울 정도다. 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어린이들의 질서를 정돈한다. 가장 먼저 바람이의 손을 잡는다. 학원까지는 겨우 스무 걸음 남짓. 호기심 많은 바람이는 길가의 자그마한 것들을 구경하느라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른다. 손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

 

문제는 나머지 한쪽 손으로 누구의 손을 잡을 것인가다. 바람이를 제외한 세 어린이들은 저번 주에는 네가 잡았으니 오늘은 내가 잡겠다며 실랑이를 한다. 그러다 셋이서 내 다섯 손가락을 나눠 잡는다. 이러한 모양새는 넘어질 위험이 있으므로 나는 두 어린이를 골라내어 짝을 지어준다. 늘 침착하고 얌전한 어린이들이 짝이 된다. 구름이는 "그래, 내가 양보한다"며 선생님의 말을 시원하게 따른다. 반면 다정이는 미묘한 표정으로 애써 친구의 손을 잡는다. 그 잠깐의 표정이 내내 마음에 박힌다. 어린 나도 그런 얼굴을 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때 엄마가 나의 손을 잡을 여력이 없었다는 걸을 안다. 엄마는 아이 둘을 데리고 무거운 짐까지 들며 목적지에 도착해야 했다. 나보다 걸음이 서툰 동생 손을 잡았어야 했다. 하지만 열두 살의 나는 어른의 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서운할 뿐이었다. 엄마 손을 잡지 못했던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 '덜 사랑받는다'는 결핍에 시달리기도 했다. 혹시 다정이에게도 그런 마음이 자라나는 것 아닐까. 사랑으로부터 밀려났다는 감각에 내가 일조하는 것이 아닐까. 무서운 걱정이 들었다.

 

학원에 도착하자 어린이들의 2차전이 시작되었다. 신발장 앞에서 누가 선생님 옆자리에 신발을 놓을 것인가 열띤 토론이 벌어진 것이다. 친구들이 투닥대는 동안 다정이는 가만히 자신의 신발을 들고 있었다. 나는 은근히 다정이 편을 들어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원장님이 간식으로 어린이들의 주의를 돌렸다. 어린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신발을 아무 데나 넣어두고 교실로 들어갔다. 다정이는 친구들이 떠난 신발장 앞에서 잠시 고민하더니 빠른 손놀림으로 신발자리를 만들었다. 그토록 야무진 손길로 내 신발 옆자리에 자신의 것을 놓은 것이다.  

 

"다정이 옆자리라서 기뻐." 나의 말에 다정이는 씨익 웃더니 교실로 뛰어갔다. 기어코 사랑의 자리를 만들어낸 다정이를 보며 생각했다. 나도 자기 전에는 꼭 엄마 옆자리를 차지했었지. 어린이는 가만히 앉아서 사랑받길 기다리지 않는다. 어린이에게 사랑은 당연한 것이라서 모자란 사랑은 또 다른 방식으로 채워 넣는다. 내가 미처 다 주지 못하는 곁을 어린이는 지켜주고 함께 한다. 그렇다. 용감한 사람들이다.



※ 글에 등장하는 어린이의 이름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꿀꿀과 야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