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림책 모임에서 이지은의 <빨간 열매>를 읽었다. 수묵화 느낌의 그림체와 강렬한 빨간색이 어우러져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이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작은 곰이 나무 밑에 앉아 있는데 빨간 열매 하나가 툭 떨어진다. 작은 곰은 이 맛있는 빨간 열매를 더 먹고 싶어서 나무에 올라간다. 하지만 열매는 보이지 않고 빨간 애벌레와 빨간 다람쥐를 만나게 된다. 마침내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간 작은 곰은 저 멀리 빨갛게 빛나는 태양을 보게 된다. 태양이 빨간 열매인 줄 알고 다가가는 순간 작은 곰은 나무에서 떨어진다. 그때 큰 곰이 나타나 작은 곰을 받아준다.
그림책 낭독이 끝나고 Y가 물었다. "여러분에게 빨간 열매는 무엇인가요?"
나는 청소년 시절부터 아주 오랫동안 극작가를 꿈꿨다. 그 과정에서 빨간 열매라고 착각한 것들을 만나기도 했다. 이를테면 나는 예술대학에 입학하면 작가가 된다고 생각했다. 글 쓰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저절로 글이 써질 거라 생각했다. 빨간 애벌레와 빨간 다람쥐를 만난 것은 즐거웠으나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오로지 글을 잘 쓰고 싶었다. 그러나 글쓰기는 손에 잡히지 않는 태양처럼 저 멀리서 빛났다. 욕망하면 욕망할수록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글이 되었다. 높이 올라갈수록 세차게 흔들릴 뿐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추락했다. 어느 날부터 아무 글도 쓰지 못하게 되었다.
나의 말을 듣던 Y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 "그린님에게 큰 곰은 무엇이에요?"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물을 마시고 산책을 하는 것, 출근하기 전에 잠깐 책을 읽는 것, 직장에서 농담을 주고받으며 일하는 것, 담백한 밥을 먹고 좋은 영화를 보는 것, 가끔 친구들을 만나 새벽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웃는 것. 이러한 사소한 일상이 나를 죽지 않게 한다. 내게 큰 곰은 '평범한 하루'다. 나는 글쓰기보다 안정적인 하루를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 되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을 영위하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작은 곰은 노란 달을 본다. 아마도 작은 곰은 노란 열매를 찾는 모험을 떠날 것 같다. 그 여정 속에서 노란 열매라고 생각되는 무수한 것들을 만날 것이다. 때론 노란색에 시선을 빼앗겨 나무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큰 곰을 떠올렸으면 좋겠다. 추락하는 나를 받아줄 소중한 큰 곰을 저마다 간직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