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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방울 Jul 08. 2024

마흔이 훌쩍 넘은 딸에게

내 새끼, 잘 챙겨 먹어라.

"엄마, 우리 토요일에 아침에 일찍 데이트할까?"

"그래. 딸냄이. 그럼 엄마랑 저녁 예불 가자."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엄마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요즘 엄마는 동네에서 오랫동안 자매처럼 지내온 친한 친구가 암으로 수술을 받으셔서 마음이 울적하시다. 거기다가 친구가 운영하는 가게를 매일 마다 봐주러 가신다. 아르바이트생도 있고, 친구분의 딸도 있는데 나이도 많은 엄마가 매일마다 출근하시는 것이 나는 못마땅하다. 내 친구가 그런 상황이라면 나도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꾸 이기적인 마음이 생긴다. 새벽마다 아빠를 챙겨드리고, 장 봐다가 반찬을 해서 친구 딸의 끼니까지 챙겨서 가져가신다. 일흔이 훌쩍 넘은 노인네가 다리도 아프신데 그렇게 매일 다니신다는 사실이 속상하다.


"엄마, 피곤하지 않아?"

"가서 앉아만 있다가 오는데 뭐가 피곤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 기분 좋은 일이지. 불러 주니 얼마나 고맙니."

엄마는 피곤하다는 말은 뒤로 하고, 이렇게 도와줄 수 있는 게 감사한 일이고 당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씀하신다.


출근길. 엄마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딸냄이, 매일 직장을 다니며 아이들을 키우느라 얼마나 힘드니? 직장 생활하는 게 보통일이 아니겠어. 대단해, 우리 딸!'

엄마가 요 며칠 친구네 가게를 잠깐씩 도와주면서 출근해 보니, 힘이 드셨으리라. 일어날 때마다 컨디션이 다르실 텐데, 마음을 쓰며 다른 사람 대신 그 자리를 메운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괜찮다고만 하시니. 나는 그것을 말릴 수는 없지만 엄마에게 무리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토요일 아침, 엄마를 만나기 전 강연이 있어서 길을 나서는데, 이른 아침 문자가 하나 왔다.

'딸냄이, 오늘 비가 많이 와서 못 만나겠다. 다음에 만나자.'

문자를 받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비 오면 어때. 비 온다고 딸을 못 만나?"

"아니, 사실은 세연이(엄마 친구의 딸)가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엄마가 좀 봐줘야 할 거 같아서. 거기 갔다가 너한테 가면 엄마가 좀 피곤할 거 같기도 하고."

나는 갑자기 너무 화가 났다. 도대체 엄마는 요즘에 매일 가는 것도 모자라 주말까지 딸 약속까지 취소하면서 거기를 가겠다는 건가!

"엄마, 나 좀 서운해. 딸하고 약속보다 그게 더 중요한가 봐. 안 그래도 매일 그렇게 나가는 게 마음이 안 좋았는데, 딸냄이 약속도 이렇게 어기고 말이지. 흥, 치, 피!"

나는 엄마의 마음도 알 것 같기에 장난치듯 말하고, 그저 그렇게 상황을 정리했다. 엄마의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1시간 후에 나에게 다시 걸려온 엄마의 전화.

"방울아, 엄마 나갈게!"

"왜 또? 거기 나간다며."

"세연이한테 얘기했지. 그랬더니, 따님하고 약속하셨는데 가셔야 되지 않냐고 괜찮다고 다녀오시라고 하더라."

"엄마, 오늘은 쉬어. 어디 가지 말고. 비도 오고, 습하니까 너무 덥네. 내일 일찍 엄마 보러 갈게."

"어머, 그래? 그럼 더 좋지. 올 때 차 갖고 와. 안 그래도 월요일에 반찬 부치려고 했거든. 네가 오면 갖고 가면 되겠다."


엄마가 힘들까 봐 서운하다고 표현했을 뿐. 나는 사실 서운하지 않았다. 이모님이 걱정되는 건 나도 같은 마음이고 내 친한 친구에게 그런 일이 생기면 나 또한 가만히 있지는 못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를 만나러 가니, 두 팔 활짝 펼치고 나를 맞아주는 엄마.

"우리 딸 왔어? 피곤하지?"

"하나도 안 피곤해. 엄마 보러 와서 좋아!"

"너 운동한다더니 피부가 엄청 좋아진 거 같아."

"엄마는 뭘 드셨길래, 할머니 피부가 나보다 더 좋아?"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서로 이쁘다고 덕담을 해주고 자리에 앉는다. 엄마는 내내 먹을 걸 챙기느라 바쁘시고.


전복에 약재까지 넣어 끓인 백숙을 딸에게 든든히 먹이고는 집에 가져가서 식구들 먹이라고 잔뜩 싸주신다. 보따리 보따리 냉장고에 있던 것들을 한 보따리 챙겨주시는 엄마. 그러는 와중에 아빠는 냉장고 싹싹 비워서 다 보내라는 잔소리 아닌 잔소리까지 보탠다.


보자기를 이미 쌌는데, 식탁에 놓은 '오란다'가 보인다.

"이거 이거 봄이 좋아하잖아. 이것도 가져가."

냉온 상자에 보자기로 꽁꽁 묶었는데, 보자기 틈으로 비집고 기어코 오란다를 넣으신다. 또 다른 가방에도 가득 넣어 들어가지 않는 상황.

"두 봉지 있던 거 그거 봄이 보내 주지. 뭐 하러 이빨도 시원찮은 노인정에 갖다 줬어?"

아버지의 핀잔. 나는 그런 말들도 다 듣기 좋다.


이제는 아버지가 너무 귀엽고, 엄마도 너무 사랑스럽다. 엄마랑 아빠랑 고스톱 치며 깔깔 웃는 모습도 안 씻는다고 눈 흘기며 잔소리하면 도망가듯 나가는 아빠의 모습도. 오랜만에 혼자 오니 좋다. 사랑 독차지.

"방울이가 올해 몇 살 된 거야?"

엄마는 내 나이를 듣고 흠칫 놀라신다. 알면서도 딸냄이 나이가 오십이 다 되어가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하셨다.

"너는 맨날 아기 같애. 손도 쪼끄맣고 이렇게 쪼끄만 게 직장 다니면서 살림하고 애들 키우고 애쓴다."

부모님에게 막내딸은 더 그런 느낌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어린 딸에게 말하듯, '잘 먹어라.', '건강 챙겨라.', '운전 조심해라.' 하시는 부모님의 말들은 모두 공통 언어. 사랑의 언어들.


"갈게요!"

"그래, 잘 챙겨 먹고."

"운전 조심해."

"애들한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너만 상한다.

지금은 말 안 들어서 속상해도, 애들은 알아서 잘 크게 되어 있어."

너부터 챙기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운전하고 오는 내내 차 안을 가득 메우고도 눈물이 되어 넘친다.


비 맞을까 봐 밖에 나와 우산을 받쳐 들고, 무거운 짐까지 당신이 들겠다고 하신다. 못 말리는 당신. 이젠 좀 말리고 싶다. 미끄러운 길을 걷지 않았으면 좋겠고, 저 멀리 오는 버스를 보고 서둘러 걷거나 뛰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인심을 내는 것도 좋지만 힘든 걸 참아내며 몸과 마음을 다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당신의 몸을 더 아껴주시길 바란다. 찔끔찔끔 쓰셔도 그 마음은 내게 벅찰 정도니까.


엄마의 반찬을 잔뜩 받아 든 손, 내 나이를 숨겨버리고 싶다. 엄마의 딸은 당연한 듯 엄마의 반찬을 트렁크에 싣고 엄마의 촉촉한 미소를 바라본다. 빈 손으로 온 나쁜 딸은 오늘도 한가득 싣고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걱정 끼치지 않는 딸이 되고 싶어요. 제가 모르는 사이에도 부모님께 걱정 한가득 보태드리는 딸이어서 늘 죄송하고요.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당신이 있어서 감사하고요. 사랑하고요. 그리고 또 사랑하고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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