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
냉동 인간 이시후,
윤영주 장편동화/ 김상욱 그림
창비 출판사
냉동인간은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으로 그려진 또 하나의 모습일 수 있다. 질병, 고통,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인간에게는 없을 수 없는 괴로운 요소들. 살아가면서 겪게 될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것이다. 아픔으로 끝나버릴 유한한 몸뚱이.
이런 인간의 삶이 유한한 삶에서 영원의 삶으로 다시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희망. 내가 지금 죽더라도 추후에 누군가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
책을 읽고 궁금해져서 실제로 냉동인간이 있는지 찾아보다 보니, 냉동인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살아있는 상태로 영화처럼 냉동이 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1976년 미국의 심리학자 교수 제임스 배드포드가 암에 걸려서 최초 냉동인간으로 보존되어 있다고 하고 그 이후로 500명 정도가 있다고 하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도 최근에 2명이 냉동인간이 되었다고 하는데, 보통은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냉동인간으로 의뢰를 하고 재미있는 건 AI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서게 될 것을 대비하여 건강한 사람도 냉동인간 상태로 보존을 예약한 경우도 꽤 있다고 한다.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냉동 인간이 다시 미래에 깨어나는 순간이 생기게 될까? 그렇다고 한다면, 미래에 깨어난 그는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난 그런 상황이 오히려 불편하다. 제발 그런 시대가 오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아무리 냉동인간을 해동시킬 수 있는 시대로 발전한다 하더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다.
여러 관점에서 또 다른 가치 있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양날의 칼처럼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끔찍한 일들도 생길 테니까.
책 속의 주인공 이시후는 40년 후에 깨어났을 때, 12살 시후는 40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선 상태이다. 시후가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시후의 곁에는 사랑하는 부모님도, 할머니도 계시지 않았다. 50살이 된 시후의 동생 정후가 남아있었을 뿐이다.
잃어버린 그 세월 속에 시후의 멈춰진 시간을 메울 수 있는 건 뭘까?
책을 읽으면서 내내 만약에 나라면, 내가 시후의 엄마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했다. 아들이 불치병에 걸려 있다면 살리고 싶은 마음으로 지금 당장 아니더라도 나의 아이가 미래라도 치료를 하여 살릴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질지도 모르지만, 내 경우에는 기약도 없는 그 세월을 견디며 차가운 곳에 보내는 것이 더욱 가슴이 아픈 일이 될 것만 같다.
나와 함께 할 시간은 짧더라도 내 품에 따뜻하게 품어 하루를 함께 하더라도 아프고 힘들더라도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마무리를 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시후가 실제로 깨어났을 때, 살아서 깨어난 것에 대해 기쁠 수 있지만 내가 살던 공감의 시대가 아닌 다른 세상에 덩그러니 놓인 낯선 상황에 잘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지만 긴 시간 동안 벌어진 세월의 차이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50살의 아저씨이지만 12살 시후에겐 동생으로 남아있는 정후.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미래의 시대에 맞춰 살아가야 하는 시후의 삶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일까?
살아있음은 그 자체로 기적이 될지도 모른다. '죽음'이라는 사실만 두고 본다면 기적이 맞다. 하지만 시후 할머니가 말씀하셨던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은 사랑, 변치 않는 가족이라는 말처럼 가족의 사랑으로 시후는 살아날 수 있었겠지만 가족의 희생을 딛고 살아난 시후에겐 어쩔 수 없이 떠안게 된 죄책감은 어찌할까.
냉동인간을 유지하기 위해 관련된 기업의 이익 추구와 빈부의 격차에 따라 냉동인간의 유지 여부 및 미래 삶의 모습이 부에 따라 삶의 형태가 극명하게 달라지는 모습은 씁쓸하게 다가오기도 하는 부분이었다.
냉동 인간은 그 자체로 논란과 이야깃거리가 많을 듯하다. 아직은 실제로 성공한 사례는 없다고 하는데, 이미 죽은 이들이 보존하는 형태로 다시 살아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거의 미라처럼 미신에 가깝다고 하니, 그 또한 재미있는 비유다.
시후 정후가 입양한 진진보라를 통해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딛고, 갈등을 좁혀가는 매개가 되어 이야기가 전개되는 느낌이다.
받아들이기 힘든 40년 후에 깨어난 시후에게 점점 세상을 받아들이고, 나로 살아가려는 그의 태도는 곁에 가족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고 폭삭 속았수다에서 나온 유명한 대사 중에서 '살민 살아진다'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시후를 보낸 후, 시후의 엄마가 매일매일 남긴 비디오 영상에서 얼마나 자식을 사랑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시후를 보냈을지 알 것 같아서 마음이 찡해지고 아파왔다.
시후는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진 후 끝난 것이 아닌, 엄마의 사랑으로 '끝(END)'이 아닌, '그리고(AND)'로 연결된 시후, 정후, 보라로 이어진다.
시후는 부모님의 바람대로 아픈 12살의 삶이 아닌, 건강하게 새로운 생명을 얻어 살아가는 시후의 모습을 얻게 되었다. 시후의 부모에겐 그것이면 충분했겠지. 개인적으로 나에겐 그게 더 슬프고 기막힌 일이지만.
그저 곁에 있는 나의 사람들과 행복한 순간들을 보내기.
언제나 나로 서 있게 하는 것은 나만의 힘이 아닌 가족들, 친구들의 사랑이 있어서 가능하다는 것.
그 모든 것을 잊지 않기로 하자.
이번 다꾸는 책을 읽고 생각처럼 표현하기란 얼마나 어려웠는지 생각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OHP 필름으로 켜켜이 쌓인 얼음, 그 얼음처럼 차가운 현실 앞에서 하나씩 녹아가면서 시후의 밝고 노란 세상이 열리는 세계를 표현하려고 했다는 것을 남겨두기로 한다. 나의 표현력으로는 제대로 나타낼 수 없었음을 아쉬움을 뒤로하며 다음의 다꾸를 기대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