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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가스라이팅 하라![02]

빈칸을 위한 여유, 나를 위한 연습

by 빛방울

오늘의 글감 : 내가 잘하는 것


'취미가 뭐예요?'

'특기가 뭐예요?'

'장점이 뭐예요?'


누군가 물어보거나 자기 소개서에 쓰는 곳에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말이다. 학생이었을 때에도 직장에서도 항상 그 칸 앞에서 멈칫 뭘 써야하나 고민했다. 쓸 것이 너무 많아서 그 중에 무엇을 쓸까 고민하면 좋을 테지만 내가 아주 특별하게 잘하는 것이 있지도 않았다. 딱히 취미 생활이라고 뭘하고 있는 것도 없었다. 특기에 그림그리기라고 쓰기에는 실력이 아주 보잘 것 없고, 취미에 독서라고 쓰기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책을 많이 읽거나 딱히 즐겨 읽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결국에는 보는 사람들에게 굳이 증명할 필요없음을 인지하고 그나마 한 번은 해본 것으로 대충 칸을 채워넣곤 했다.


2번째 글감이 내가 잘하는 것이라는데, 나는 잘하는 게 뭘까? 사실 잘한다는 것이 꼭 특기를 써야 하는 것은 아닐 텐데 어떤 고정관념이 나를 꽉 잡고 있는 듯하다. 좀 느슨하게 힘을 빼고 생각해보자.


요즘엔 나에 대한 기준이 높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나를 만족시키는 법을 알게 된 듯 하다. 나이가 들면서 생존 방법의 개수가 많아진 덕분일 것이다. 시간이 가르쳐 준 경험으로 쌓인 지혜들. 이젠 내가 가진 것 중에 무엇을 쓸까를 고민하는 사람이 되었다. 거만하게 나 잘났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는 나를 판단하는 기준이 타인이었다면 이제는 나를 만족시키는 것은 바로 '나'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악기를 다루는 수준이 전공자나 다른 취미생처럼 뛰어나지 않더라도 악기 다루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면 그것은 나의 취미가 되고 특기가 된다. 어쩌면 아예 못하는 사람보다는 잘하는 것 아니겠는가!


캘리그래피를 나의 특기로 쓴다면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나 프로처럼 잘 쓰는 분들에 비해서야 비교도 안된다. 하지만 예쁘게 쓰고 꾸며서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선물하는 것을 즐겨한다. 작품을 만들 때 행복하고 나눌 때 그 행복은 배가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편안하고 따뜻하게 잘 대한다. (앗,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갑자기 조심스러워진다.) 어릴 적엔 수줍고 말주변이 없던 나는 이제 처음 보는 낯선 이들에게도 다가가 도움을 전할 수 있고 누군가를 만날 때 눈을 마주하고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 상대방이 나를 편안하게 생각하고 따뜻함이 들게 되고 좋은 관계를 맺게 되는 멋진 선물로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고 싶어 하는 일들이 많아진다. 나의 업을 뒤로 하고 나를 희생할 정도의 에너지를 쏟을 만큼 넉넉한 품은 아니지만, 내가 가진 그릇 안에서, 내가 닿을 수 있는 만큼 베풀고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누구나 처음부터 잘하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연습을 아직 하지 않았을 뿐이고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잘하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서일까? 나는 새롭게 도전하는 것을 잘한다. 무엇을 시작할 때 두려움보다 설레임과 호기심이 많아서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다. 기웃기웃 하다가 해보고 내가 좋아하면 뛰어들고, 빠져서 하다보면 취미가 되고 나만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내가 잘하는 것은 두려움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실패해도 괜찮다는 믿음이다. 잘하지 못하더라도 혹은 실패하더라도 일단 뭔가를 도전하면서 의미있는 것을 얻게 된다는 확신이 있다. 예전의 나보다 동동거리며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여유와 어떤 방향으로든 성장하고 잘 될 거라는 긍정적인 마음 덕분이다.


어제의 나보다 나는 더 멋지고 잘하고 있다.

어제의 나보다 나는 더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있다.

어제의 나보다 나는 더 친절해지고 따뜻한 가슴을 품고 있다.

어제의 나보다 나는 더 지혜로워지고 가슴 뛰는 삶을 살고 있다.

어제의 나보다 나는 앞으로도 나를 더 사랑하고 다른 이들을 사랑하며 살게 될 것이다.


내가 잘하는 것은 내가 잘하고 있다고 믿고 스스로 믿을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는 힘이 있다는 것.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고민하며 오늘의 빈칸을 채우는 숙제를 내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나를 위해 빈칸을 오래 비워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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