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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즘작가 Nov 26. 2023

편향되지 않기

세상에 객관적인 사실은 어디에도 없다.

시작에 앞서,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여러 관점을 이해하기 전에 '편향된' 생각으로 모든 판단을 내리지 말자는 의도일 뿐, 모든 상황에 대해 본인이 주장하는 바 없이, 일종의 '중립' 위에 존재하며 입장과 생각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명확히 밝힌다.


객관적인 사실은 어디에도 없다.


사회복지와 상담심리학을 4년간 공부하며, 이래저래 가장 확실하게 ‘진리’라고 받아들인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정말 세상에 ‘객관적인’ 사실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우린 어떠한 작은 상황에 대해서도 각자의 경험과 생각이 다르며, 누구에게는 긍정적으로, 누구에게는 부정적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같은 생각을 하는 이유는 각자 다를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인지한다는 것 만으로도 어느정도 정의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음… 정의롭다는 단어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만, 공정함에 대해서 가장 강조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나의 입장보다 상대의 입장을 더 고려하는 것이 아니지만, 나의 입장을 표명함에 있어서, 상대의 입장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기적이지도 않지만, 자신의 권익만을 희생하면서까지 이타적이지는 않은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공정함이다.




'당연한 일'로 만들자.


잠깐 개인적으로 깨달은 부분에 대해 짧게 나누고 넘어가려 한다. 궁금하지 않으셨다면 죄송하지만 내게 이 깨달음은 최근 1년간 가장 큰 변화를 주었기에 평소 감정적이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평소에 나는 무거운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 전혀 아니고, 가벼운 농담 따먹기를 즐기는 사람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누구든 다가오기 쉽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모습이다. 그 이면에 호기심을 채우고, 인격적, 지적인 성장을 하고자 하는 모습이 있지만, 그것은 앞선 이미지 탓에 쉽게 드러내지 못한다. 하지만, 주변에 몇몇 깊이 있는 생각들을 편히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 최근에 나누고 있는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유와 당연함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 발생하면, 일차적으로 감정이 먼저 올라오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애써 그런 감정을 잠시 끌어내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의 뇌는 마치 on/off 스위치와 같아서 감정이 올라온 상태에서는 이성적인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억울함을 느끼면 그 감정을 호소하고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 이들에게 짜증이 날 뿐,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갈등이 일어난 순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해볼 때에도 모두 해당된다.


TV와 기사에서는 늘 자극적인 말들로 우리를 선동하고, 작은 사실도 아주 큰 일처럼 보이게 하며, 때로는 정말 중요한 문제도 별 것 아닌 일처럼 만들어 우리의 기억에서 빠르게 지우려 하기도 한다.


감정이 올라오려 할 때(그것이 때로는 아쉬움일 수도, 분노일 수도, 부러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끓어오르는 감정을 잠시 식혀보자. 가끔 친구들 중에 아주 감정적인 친구들은 그런 상황에 눈물부터 차오른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말이다.. 이 과정은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니까. 그럼 그 감정을 식히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아주 간단하다. “왜?”라는 질문만 던져보면 된다. 상대는 왜 이런 일을 했을까.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지는 않았을까.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도 상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해야 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는 순간, 많은 상황에서 우리는 ‘당연한 일’이 일어났던 것임을 깨닫곤 한다.


‘아, 내가 너무 급한 마음에 계속 정신 없이 서둘러서 중요한 서류를 두고 왔네. 그래, 내가 치매라던가 기억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 다급한 아침을 보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네.’
‘아, 머리를 감을 때, 머리가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은 내가 탈모라서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지.’
‘아, 내가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한 것을 보니, 나보다 열심히 공부한 친구들이 많았구나. 나는 그만큼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다른 일들에 시간을 쏟았으니 성적 말고 갚진 것들을 얻었네.’
‘아, 내가 중요한 시간에 졸고 있었던 것은 내 집중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 잠을 충분히 잘 수 없었었지, 참. 얼마 못 잤으니 당연한 일이네.’


이렇게 당연한 것들이 당신의 삶에서 늘어나다 보면, 포용력이 늘어나는 것과 더불어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상황 자체가 눈에 띄게 줄어든다. 이것은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방식, 즉, +를 늘려주는  방식은 아니지만, 당신의 삶을 괴롭히는 걱정과 어려움, 불필요한 감정소모를 줄여주어 ‘흔들리지 않게’ 만드는, 즉, -가 될 상황을 줄여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정말 사소한 차이 같지만, 가장 큰 매일의 변화를 만들어 줄 것이라 확신하니, 꼭 의식적으로 실천해보면 좋겠다.


상대에게 짜증내기 전에 먼저 이유를 물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치에 해당한다. 상대는 가끔 내 뜨거운 머리를 식혀줄 수 있는 물을 가지고 있을 텐데, 그 물을 꺼내기도 전에 당신의 열을 쏟아내 상처를 준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그 상대는 많은 경우에 자신 스스로일 것이다.


물론, 묻기 전에 파악하는 것이 당연히 가장 좋다. 생각보다 우리가 잠깐만 생각해보면 추리할 수 있는 일들도 참 많기 때문이다. ‘아.. 시간을 보니 이 친구, 퇴근하자마자 뛰어왔는데 조금 늦었나보구나.’ 혹은 ‘명절이라 본가에 잠시 갔다고 들었는데, 가족들과 시간을 간만에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겠구나.’ 같은 것들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아쉬워하거나 분노할 필요가 전혀 없으며, 그것은 본인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예시들과 삶의 적용점


그래서 다시 돌아오자면, 우리는 상대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의 황금률처럼 말이지.

우리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한다. 그것은 종교적인 의미를 차치하더라도 진리와 맞닿은 것이므로. 우리는 상대에게 이해 받기를 원하면서도,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에 열심을 다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내로남불에 대해 ‘인간이라면 다 그렇다’ 정도로 일축하겠지만, 그런 이기적인 생각은 세상을 나아지게 만들 수 없다.


몇 가지 쉽게 떠오르는 경험으로 예를 들어보려 한다.


카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나로서는 굉장한 집중력이 요구된다. 그런 내 옆 자리에 4인 가족이 앉았다. 부모님과 어린 아이(대략 초등학교 고학년 쯤 되는) 둘이었다. 대개 아이들이 그렇듯이 이 아이들 또한 쉬지않고 떠들었고, 휴대폰으로 큰 소리가 나는 영상을 틀어댔고(물론 부모님의 제재를 받아 어느 정도 소리를 줄였지만), 자꾸 자기들끼리 욕을 해서 한 두시간동안 곤욕을 치렀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나는 짜증을 내야 할까? 물론,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지만 짜증나진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 가족끼리 함께 카페에 와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좋아보였기 때문이고, 부모님은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을 적당한 수준으로 통제해주셨기 때문이다. 특히나, 가장 이성적으로 내 짜증을 잠재운 것은, 당연히 저 나이의 아이들이라면 취할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 나이 때, 쌍둥이와 지독하게 싸워댔던 모습이 떠올랐고, 단지 내가 불편하기 때문에 옆자리의 아이들이 다 입 다물고 있는다는 것은 꼭 옳지 만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그 아이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을 했다는 것이지.


그렇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우리 스스로의 이익과 가치를 위한 생각은 자동적으로 하지만, 그 다음 스텝으로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이 노력은 단순히 상대에게 베푸는 어떠한 자비라던지 내가 ‘이해해준다’는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깊이 이해하게 되면, 내가 화를 낼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 경우가 많아지고, 그로 인해 쌓였을 스트레스 역시 고스란히 없던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내 정신적인 건강함과 상대에 대한 이해, 그 모든 것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배려’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 하나의 예시를 들어보려 한다. 얼마 전, 잠시 작은 논란이 되었던 카페의 ‘이용시간 제한’에 대한 것이다.

나도 그렇지만, 우리 부모님도 책을 읽거나, 대화할 시간에 집중하기 위해 카페를 자주 찾으신다. 그런 상황에서 엄마는 E 프랜차이즈 카페의 ‘한 메뉴에 3시간 이용 제한’에 대한 기사를 보시고는, 가족 톡방에 공유하시며 불만을 토로하셨다.


3시간 마다 새 음료를 주문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 부담이지 않느냐고. 물론, 나도 알고 있었다. 단순히 공감을 요구하는 말이었음을. 그렇지만ㅋㅋㅋㅋ 역시나 솔직한 생각을 말씀드리고 말았다.

나도 카페를 많이 다니지만, 음료 한 잔 마다 어느 정도씩 이윤을 남긴다고는 해도 전기세, 인테리어 비용과 월세, 난방비 등을 전부 감당하기에는 당연히 회전율이 높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너무 오랜시간 자리를 지키며 이런저런 충전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겠냐고… 3시간이면 나름 배려를 한 시간인 것 같다는 말도 덧붙여버렸다.

커피 한 잔에 대한 손익분기점이 1시간 42분 정도라던데 3시간이면 은근 잘 쳐준 것 같다는 말과 함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엄마의 입장은 정말 당연한 생각이고, 합리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카페 사장님의 입장이 고려되지 않았을 뿐이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이녀석 머리 좀 컸다고 잘난 척 하네.’ 라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지만(아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ㅋㅋㅋ) 모두가 자신의 입장만 생각한다면, 늘 우리는 서로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지만 의도적으로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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