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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주 Nov 05. 2023

민감한 사람들을 위한 고독

싱그럽게 반짝이던 초록잎이 어느새 붉게 타들어가고 있다. 우수수 떨어진 낙엽들을 보며 지난 세월과 과거의 인연들을 떠올리는 나는 영락없는 F형 인간이다. 이상하게 가을만 되면 내 안에 깃든 모든 감정이 각양각색의 단풍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별 거 아닌 일에도 눈물이 났다가, 반대로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웃음이 났다가 한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정신을 못 차리는 일들이 허다하다. 예민하고 민감한 성향을 지닌 나는 이런 내가 종종 못마땅하게 여겨질 때가 많다. 혼란스러운 현대 사회에서 매우 민감하고 감정적인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란 쉬운 일은 아니니까.


어릴 때부터 나는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너는 너무 생각이 많고, 예민하며, 사람들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것 같아 “하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 소리는 마치 내가 무언가 잘못해서 죄를 지은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때마다 나는 감정적인 내가 정말이지 별로였다. 참다가 터진 눈물 한 방울에도 죄책감을 느꼈고, 억누르고 억눌렀던 감정이 비집고 나와 짜증으로 표현되었을 때도 오로지 내 잘못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감정적으로 태어난 내가 밉고, 싫었다. 왜 다른 사람들처럼 이성적이고 논리분석적으로 사고할 수 없는 존재인가, 나는 왜 한순간도 생각을 멈출 수 없고, 소음과 빛, 모든 것에 민감한 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토록 별 거 아닌 일들에 하나하나 신경을 쓰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들을 했다.


나는 고슴도치였다. 거꾸로 된 고슴도치. 밖을 향해서가 아닌 안으로 가시가 자라나는 고슴도치. 자꾸만 자라나는 가시들은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더 굵어지고, 날카로워졌다. 다채로운 감정들이 방울방울 생겨날 때마다 나는 생겨난 가시들로 방울을 톡 톡 하며 하나도 남김없이 터뜨렸다. 여전히 내 머릿속엔 감정적인 사람=죄인, 이상한 사람이라는 공식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가 ‘나’ 자신이 아닌 상태로 숱한 날들을 보냈다. 그러니 자주 불안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감정적인 내 모습 대신 내가 만들어낸 페르소나로 나 자신을 꽁꽁 감추며 살았다. 쿨한 척, 다 이해하는 척,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척척척. 어느새 이십 대 후반이 되고 나니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나는 가장 거대하고 두꺼운 껍데기 속에 갇혀 덜덜 떨고 있는, 곧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희미한 존재나 다름없었다.


그런 나를 구해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나’ 자신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나를 감히 ‘직면‘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를 직면한다는 건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토록 못나고 별로인, 상처투성이인 나를 마주하는 일은 내가 만든 멋진 페르소나의 나를 완전히 부정하는 일이었고, 그것을 부정하는 순간 내가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스무 살 후반. 인간관계도, 가족도, 회사도, 연인관계도 모든 게 힘들었던 순간이었다. 심지어 육체적으로도 갖가지 질병에 걸려 온갖 염증으로 고생하던 나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내가 만들어낸 가시들은 내 내면뿐만 아니라 알게 모르게 주변까지 뻗쳐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혼자가 되기를 결심했다.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 온전히 나와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의도치 않게 삶은 나를 고독으로 이끌었다. 돌아보니 내게 주어진 고독의 시간이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이끌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독의 시간 속에서 나는 올라오는 감정들을 모두 허용해 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없었으므로. 누구도 만나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자주 울었다. 그동안 참았던 모든 눈물을 쏟아냈고, 절대로 참지 않았다. 이불속에서 원하는 만큼 실컷 울고, 또 울고 짜증이 나면 짜증을 냈다. 화가 나면 실컷 분노를 느꼈고, 글로 표현하거나 연습장에 마구 볼펜으로 긋기도 했다. 그렇게 감정들을 하나둘씩 풀어낸 지 2-3개월이 되자 무언가에서 해방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민감한 사람이었고, 잘못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감정은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더 거세게 튀어 오른다는 것, 민감한 사람은 절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나는 원래 감정이 다채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동안 나는 진정한 내 모습을 관계 속에서만 찾으려 애썼다. 그러니 결코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타인에게 잘 보이려 애쓰고, 맞추려 할수록 내가 만든 가면은 더 두꺼워져만 간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로 오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의도치 않게 마주한 고독은 처음에는 혹독하게 느껴졌으나 그 시간은 쌓여온 껍데기를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는 일련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내 본래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해 준 건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이 아닌 오직 내가 나와 함께한 시간들 속에서였다.


민감한 사람일수록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오는 에너지를 잘 흡수할 수밖에 없다.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고독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전에는 나와 대화하는 일이 가장 어색하고, 불필요한 일이라 생각했으나 지금은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때 그 고독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그 고독의 시간에서 나를 마주하지 않고 또다시 다른 ‘중독’으로 회피하려고 했었더라면 나는 완전히 나를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비로소 민감한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완전히 사랑한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나는 그 길로 가는 여정에 서 있으며 그 길을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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