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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주 Dec 25. 2023

크리스마스의 시선

어쩐지 아침에 눈이 번쩍 떠졌다. 쉬는 날이라 무조건 늦잠을 자리라 다짐했건만, 다짐이 무색하게도 나의 두 다리는 저절로 거실을 향하고 있었다. 새하얀 커튼을 걷자, 온통 하얗게 변한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와!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우와!"

몇 번을 아이처럼 소리쳤는지 모른다. 신나고 설레는 마음. 여전히 눈 내리는 걸 보며 느껴지는 행복 앞에서 서른 넷이라는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눈송이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며 천천히 바닥을 향해 내려앉는다. 마치 낙하산을 펴고 내려오듯, 느리고 평온한 모습으로. 굵고 커다란 눈송이들이 소복소복 바닥 위에 쌓이고, 나는 그 바닥을 처음으로 밟는 이가 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낀다.

어느새 잠에서 깬 남편이 비몽사몽으로 눈을 비비며 내 뒤로 선다. 

"오. 눈이 엄청 많이 오네."

평소에는 감성적이지 못한 남편이지만, 온통 하얗게 변한 세상을 보더니 무언가 느끼는 모양이다. 우리 둘은 한참을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침 눈이 쌓인 나무 위로 새하얀 배를 자랑하는 까치가 앉았다. 눈 내리는 풍경 속 까치는 마치 우리가 산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까치는 한참을 앉아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까치는 눈이 내리면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떤 감정을 느낄까 하는 쓸모없고 다정한 생각을.

 이렇게 눈이 오는 날이면 자연스레 뜨거운 커피가 생각난다. 남편과 나는 두툼한 점퍼를 꺼내 입고, 아침 일찍 여는 카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빵집 앞을 지나는데 어제 본 자매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발끝까지 오는 하얀 패딩을 입고, 수면 잠옷을 입은 채로 케이크를 신나게 사가던 자매의 모습이. 막 집에서 나온 소박하고 다정한 자매의 모습이 얼마나 보기가 좋던지. 따뜻한 집으로 가 달콤한 케이크를 먹을 자매를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와 남편은 우산 하나로 펑펑 내리는 눈을 막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눈은 내 신발과 옷, 곳곳에 스며들었고 나는 그것조차 행복이라 느꼈다. 마침내 도착한 카페는 후끈할 정도로 따뜻했다. 우리는 각자 좋아하는 커피와 빵을 시켰고,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큰 창을 통해 펑펑 내리는 눈을 감상하고, 또 감상했다.

케이크를 사러 온 손님들이 속속들이 도착했고, 한 손에 케이크를 들고 카페 문을 나서는 이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엄청나게 특별하진 않더라도, 소소한 기쁨을 누리는 하루가 되기를. 모르는 사람들인데도 괜히 그런 마음이 드는 오늘이었다. 고소하고 진한 커피를 한 입 머금고, 천천히 책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음악과, 가벼운 침묵이 꽤 마음에 들었다. 나는 한동안 그렇게 책을 읽었고, 남편은 앞에서 핸드폰을 만지며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했다. 

20대 때까지만 해도 크리스마스는 특별해야만 하는 날이었다. 무조건 나가서 멋진 곳에서 밥을 먹어야만 했고, 그런 것들을 인증해야만 하는 날인 줄만 알았다. 어떻게든 악착같이 혼자 보내지 않으려 애썼고, 늘 누군가와 함께 보낸 날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생각들 속에서 크리스마스는 '부담'스러운 날이 되어만 갔다. 나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줄 몰랐다. 혼자 보내든, 잔잔하고 소박하게 보내든, 어떻게 보내든 간에 내 마음 가짐에 따라 그날이 행복할 수도, 우울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 이제야 내가 만든 강박적인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집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도 얼마든지 좋을 수 있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을 수 있구나를 실감한다.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며 놀이터에서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을 보는 건 참으로 즐거운 일이구나. 나는 그동안 너무 보이는 것들에만 집착했구나를 알아차린다. 이런 날은 각별해야만 해라는 강박을 진작에 버렸더라면, 나의 크리스마스들은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었을 텐데. 겉으로만 즐거워 보이는 날들을 얼마나 많이 보내왔던가. 돈은 돈대로 쓰고,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았던 날들이 떠오른다. 이제라도 알 수 있게 되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평일을 크리스마스와 같은 기분으로, 크리스마스를 평일처럼 보낼 수 있도록 연습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은 내가 사는 모든 순간이 소중하니까. 소중하지 않은 날은 없으니까. 어떤 날만이 소중하다면, 그렇지 않은 수많은 날들은 아무런 의미도, 흥미도, 느낄 수 없는 날들이 되어버리니까 말이다. 그러니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merry a day! 를 외치는 나이기를. 아무리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날들이라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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