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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비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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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주 Jan 02. 2024

나비인간3. (단편소설 마지막)

저벅. 저벅. 저벅. 지온은 어느샌가 어두운 숲길을 걷고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껴 있었고, 중간중간 희미한 달빛이 고개를 내밀었다. 흙길은 비가 온 듯 촉촉했고, 맨발이었던 지온은 부드럽고 서늘한 감촉을 느꼈다. 한참을 걸은 그녀는 적막하던 숲속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데,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소리는 마치 이웅 이웅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애응 애응 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도저히 입으로는 표현 못 할 소리였다. 마치 외계인이 실존한다면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올 것만 같은 소리였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걷던 중, 저 멀리 앞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지온은 순간 자신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고, 빠른 속도로 날아 빛이 나오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은 가지각색의 들꽃으로 이루어진 들판이었다. 들꽃 하나하나는 모두 처음 보는 꽃들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드넓게 펼쳐진 들판의 가운데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거대한 은행나무였다. 가지들은 아주 크고 튼튼해서 성인 몇 명이 매달려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거대한 가지 아래는 커다란 번데기 세 개가 매달려 있었다. 그중 하나가 갑자기 격렬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내 번데기의 껍질은 모두 벗겨졌고 나무 아래에는 길쭉하고 큰 생명체 하나가 꼿꼿하게 서 있었다. 공중에 뜬 것 같기도 한 그 생명체는 서서히 날개를 펴기 시작했고, 펼친 날개는 독수리 날개보다도 컸다. 날개 속에는 하얗고 투명한 몸체가 있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도무지 성을 알 수 없는 그 생명체의 얼굴을 바라보니 눈동자는 호박색으로 빛났고, 코는 아주 작았으며 입술 또한 굉장히 얇고 작았다. 그것의 머리칼은 매우 부드러운 은색 실타래를 풀어헤친 것만 같았으며, 엉덩이까지 늘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것의 머리칼이 이리저리 휘날렸고, 마치 은하수가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굳게 다문 그것의 입이 벌어졌고, 알사탕만했던 입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입은 얼굴의 반 정도 크기까지 커졌고,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블랙홀 같은 소용돌이가 빠르게 같은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거대한 심연이 저 너머에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면서 지온은 급격히 불안해졌다. 그러나 아무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것의 날개는 점점 파란색으로 변하더니 이내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것의 입은 다시 작아지기 시작했고, 이내 굳게 닫혔다. 날갯짓을 여러 번 하던 그것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번쩍이는 파란색 날개가 거센 파도처럼 보였다. 그것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어느새 들판 위에는 고요와 적막만이 가득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똥별이 하나, 둘, 세 개가 떨어지는 게 보였다. 가지 아래 남은 두 개의 번데기가 또다시 격렬한 움직임을 보이는 게 느껴졌고, 순간 그녀는 모든 장면이 일그러짐을 느꼈다.     

 핸드폰 화면을 보니 시계가 새벽 7시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전히 속이 좋지 않았다. 간 밤에 꾼 꿈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다. 지온은 외투를 걸친 후 바깥으로 나갔다. 앞마당을 손보고 있던 노부부가 지온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잘 주무셨어요? 좋은 아침입니다.”

 “네. 덕분에 잘 잤습니다.”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오늘 친구분들과 여기 뒤쪽에 있는 나비 정원에 한 번 다녀와 보세요.

 순간 지온은 멈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나비 정원이요?“

 ”네. 겨울에도 나비를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온실이랍니다.“

 할머니가 끊임없이 잡초를 뽑으며 말했다. 지온은 얼른 그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무언가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자신을 뒤따라 나온 수은이 보였고, 그녀는 바비큐장 뒤쪽으로 걸어갔다. 담배를 피우러 가는 게 분명했다. 지온은 앞마당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른 후, 차가운 겨울 공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차갑고 상쾌한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고, 부정적인 감정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한참을 앉아 있다 들어가니 말끔해진 모습의 유리가 거실 한쪽에서 통화하고 있는 게 보였다. 지온은 말없이 부엌으로 들어가 어제 사두었던 라면 세 봉지를 꺼내 끓이기 시작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물을 한참 들여보던 중, 지온의 옆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게 느껴졌다. 그림자는 한동안 움직임 없이 옆에 서 있었다. 지온도 아무 말이 없었다. 물이 끓었고 지온은 봉지를 뜯어 면과 스프를 넣었다. 그림자는 어느새 움직이기 시작했고, 아무렇게나 뜯어져 있던 라면 봉지와 스프 껍질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완성된 라면을 식탁 위에 두었다. 유리와 지온은 마주 앉았다. 유리가 입을 열었다.

 “지온아.”

 “… ….”

 “지온아. 진짜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는 거 말고는 할 말이 없어. 어제 내가 한 말들도, 네가 나한테 한 말도 전부 기억나.”

 ”괜찮아. 그럴 수 있지. 빨리 이거 먹어. 면 불기 전에.”

 지온이 면을 후후 불며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유리와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내 자격지심 때문이었어. 그래서 네가 그렇게 힘들게 살아온 것도 다 알면서 모른 척했어. 지금 내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했으니까. 너희가 항상 나 배려해준다는 것도 알았어. 근데 그때뿐이었어. 잠시 잠깐 고마웠다가 또 내 상황이 힘들면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고. 자유로운 너희가 한없이 부럽고. 내가 혼자였다면 어땠을까, 좀 더 늦게 결혼했으면 달랐을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어. 그러다가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게 과연 엄마로서 가질 수 있는 생각인가, 나는 진짜 벌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구나 하면서도 또다시 반복되고. 한 번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니까 끝도 없이 빠지게 되더라. 남 탓만 하게 되고. 내가 어떤 말을 해도 하소연처럼 들릴 거라는 거 알아. 그래도 침묵하고 있는 것보다 표현하는 게 나은 것 같아서. 미안해. 정말로.”

 지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젓가락으로 집어 들던 면을 다시 그릇에 내려두고 말을 이었다.

 “유리야. 나는 안정적으로 살아보고 싶었어. 우리 집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불안했으니까. 근데 독립을 하고, 돈을 벌어도 똑같더라. 여전히 나는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못하고, 내가 기댈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지 못했고, 내 미래가 불안하고, 현재도 불안하고. 그래서 너 말고도 결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움을 참을 수가 없더라. 안정된 기분. 난 언제쯤 그런 걸 느껴볼 수 있을까 싶었어. 넌 내가 혼자라서 부러웠겠지만, 난 철저히 혼자인 기분에서 한 번쯤이라도 벗어나 보고 싶었거든. 자유로워 보였겠지만, 사실은 내가 만든 외로움과 불안에서 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해. 그 감정을 어떻게든 억눌러보려고 항상 바쁘게 지냈을 뿐. 그렇게라도 지내지 않으면 못 견디겠더라고.” 

 유리는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사이 바깥에 있던 수은이 짙은 담배향을 풍기며 식탁에 앉았다.

 “뭘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들을 해? 나 이거 먹으면 되지? 잘 먹을게. 누가 끓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은은 곧장 국자를 들고 냄비 안에 있던 라면을 듬뿍 떠서 먹기 시작했다. 유리의 그릇 안에는 먹지 못해 남은 라면이 퉁퉁 불어 있었다.

 “얼른 먹어. 김유리.”

 지온이 말했다. 

 “수은아. 어제는 내가 정말로 미안…….”

 “김유리. 너 육아하고 일까지 하느라 힘든 건 알겠는데, 네 맘대로 착각하고 판단하는 거. 그거 이제 하지 마.”

 수은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젓가락질과 동시에 국물을 떠 먹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독립하지 못한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런 걸 세세하게 설명한다고 한들 결과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지금 난 캥거루족이 맞고. 김유리 네 말 맞아. 근데 네가 내 삶을 살아본 건 아니잖아. 네가 내 환경, 내 가족, 내 처지로 살아본 것도 아닌데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단정 짓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거야말로 오지랖이라 생각해. 우린 절대로 상대방의 삶을 단정 지을 수 없어.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의 삶만 살아볼 수 있으니까.”

 “미안해. 수은아. 지온아. 이제 알았어. 내가 진짜 어리석었다는 거. 정작 가장 어른이 되지 못한 건 나였다는 거. 그리고 고마워.”

 셋은 고개를 숙인 채 라면을 먹었고, 국물까지 남김없이 먹었다. 그리고는 빠르게 짐을 정리한 후, 바깥으로 나와 노부부가 말한 나비 정원으로 향했다. 나비 정원은 뒷마당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길목 즈음에 위치 해있었다. 투명하고 튼튼한 유리로 지어진 나비 정원으로 들어가자 싱그러운 꽃향기가 그들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형형색색의 나비가 정원 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름다운 나비의 날갯짓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던 중, 유리가 나뭇가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 좀 봐! 번데기야! 꿈틀꿈틀 거리는 데?”

 “헐. 대박. 번데기가 보자. 하나, 둘, 셋. 세 개인데?”

 번데기는 심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지온과 유리, 수은은 집중해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비는 젖은 날개를 꿈틀거리며 아주 천천히 탈피를 시도하고 있었다. 각각 떨어져 있는 세 개의 번데기에서 거의 동시에 탈피가 이루어졌다. 하나는 파란색 날개를 가졌고, 하나는 흰색, 하나는 노란색을 띠고 있었다. 세 나비의 탈피 과정을 지켜보던 이들은 마치 마법에 홀린 듯 황홀한 눈빛으로 그것들을 지켜보았다.

 “어제 꿈에서 나비 인간을 봤어. 파란 날개를 가진.”

 지온이 말했다.

 “응? 나비 인간은 또 뭐야? 너무 영화를 많이 본 거 아니야?”

 “그러게. 난 아무 꿈도 안 꿨는데.”

 수은과 유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지온은 진지했다. 꿈과 현실이 마치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분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탈피를 끝낸 나비는 젖은 날개를 서서히 폈고, 이내 비행을 시도하려는지 나뭇가지 위를 기어 다니고 있었다. 지온은 그 모습을 더 지켜보고 싶었으나 수은이 피곤하다며 얼른 가자고 재촉하는 바람에 그 모습은 끝내 보지 못했다. 노부부는 그녀들을 숙소에 방문할 때와 마찬가지로 친절하게 배웅해주었고, 그녀들 또한 노부부에게 연신 감사를 표했다.

 유리를 대신해 수은이 운전을 했고, 유리는 수은의 옆에 앉았다. 지온은 어제와 같이 뒷좌석에 앉기를 택했고 차 안에는 정적과 고요만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원래의 일정과 달리 셋은 각자 집으로 가자는 데 동의했다. 차를 타고 가는 유리를 먼저 배웅해주고 지온과 수은은 기차역 안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와. 엄청 피곤하네.”

 “그러니까. 우리도 이제 나이가 든 거지. 20대땐 어떻게 밤 새고 놀았나몰라.”

 수은은 막 나온 초코라떼를 빨대도 꽂지 않은 채 들이키며 말했다. 수은의 기차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먼저 안으로 들어가 있겠다며 지온을 향해 손을 흔들며 사라져 갔다. 지온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꼈다.

 지온은 한참 카페에 앉아 여행에서 있던 일과 자신의 꿈을 되돌아보며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슬펐다가, 화도 났다가, 씁쓸했다가, 묘했다가, 이런저런 감정의 기복에 시달렸다. 마침내 기차에 탄 그녀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를 틀었다. 어릴 때 자주 들어 익숙한 노래였다. 그러나 어릴 적에 이 노래는 분명히 신나고 즐거운 노래이기만 했는데, 지금 들으니 이토록 현실적으로 와닿을 수가 없었다. 왜 어른들이 이 노래를 들으며 공감하며 진지해졌는지, 지온은 그 나이가 되어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KTP 인순이 조pd

 let's party

 인생 끝날 때까지 come on

 우리들의 얘기로만 긴긴밤이 지나도록

 세월이 지나도 변치 말자고 약속했잖아

 영원토록 변치 않는 그런 믿음 간직할래

 세월이 지나서 다 변해도 변치 않는 것 하나

 이젠 뭘 하더라도 그시절 같을순 없으리오

 이제 바쁘더라도 가끔 전화를 해 보시오

 이젠 뭘 하더라도 그때와 같을순 없으리오

 이제 바쁘더라도 우리의 추억을 기억해줘

 이젠 뭘 하더라도 그시절 같을순 없으리오

 이제 바쁘더라도 가끔 전화를 해 보시오

 이젠 뭘하더라도 그때와 같을순 없으리오

 이제 바쁘더라도 우리의 추억을 기억해줘

 친구여.”     

 지온은 몇 번을 반복해 들은 후, 침울해지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그런 기분이 견디기 어려워진 그녀는 얼마 전 요가원에서 선생님이 추천해준 요가 음악으로 바꿔 들었고, 기분이 점차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문득, 늘 그녀와 함께 수련을 다니며, 여행을 다니는 사회 친구 K가 떠올랐다. 유일하게 함께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던 독서 모임에서 만난 J도 떠올랐으며, 자기 계발을 하며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Y 또한 생각났다. 지온은 얼른 서울로 가 그녀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지이잉- 조용하던 핸드폰이 울렸다. 


 K:지온! 다음 주 요가하고 근처 브런치 카페 가는 거 어때? 얼마 전에 갔던 요가원 진짜 좋았다고 말했었잖아. 이번엔 너랑 같이 가려고! 시간 괜찮으면 말해줘 >_< !!


 지온은 설레는 마음으로 답장했다.     

지온 : 당연히 가야지! 안 그래도 거기 궁금했었는데. 너무 좋다! 아 맞다. 저번 주 만난 그 사람은 어땠어? 그 이야기도 너무 궁금한데? :-)

K : 만나서 해줄려고 단단히 아껴뒀지. 전화하려다 참았다? ㅎㅎ 그 날 귀에 피날 준비 하셩!

지온 : (웃음)(웃음) 오케이. 기대합니다. 귀 단단히 준비하고 간다. 얼른 다음 주가 왔으면.     

 지온은 아까와는 달리 훨씬 가볍고 부드러워진 마음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예전처럼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 슬프고, 무거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게 어색했으나 이 느낌이 좋았다. 이어폰에서는 잔잔한 요가 음악이 계속해서 흘러나왔고, 완전히 편안함을 느낀 지온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기차는 소리 없이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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