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융합이 의미가 있지는 않더라도
천하장사라는 아이들 간식이 있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 매점에는 없는 천하장사를 먹으려고 쉬는 시간에 담장에 매달려 담장 밖에 있는 문방구 아주머니께 한 개요! 두 개요! 이렇게 외치면 아주머니께서 주문받으신 수량대로 들고 달려 나와 동전과 천하장사를 바꾸어 가셨다. 쉬는 시간에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없었으니, 매 시간마다 5-6명씩 담장에 매달리곤 했다.
소시지처럼 생기고 소시지처럼 포장된 천하장사.
그런데, 이 놈이 사실은 소시지가 아니라 생선살이 주 재료라서 소시지들이 호부호형을 허하지 않는다는 마음 아픈 소식을 들었다. 생긴 것이 비슷한 것으로는 안 된다는 거다.
그러니, 천하장사는 소시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딸에게 전했더니, 딸이 더 마음 아픈 이야기를 한다.
그럼, 튀기지 않았으니 오뎅들도 호부호형을 허하지 않겠네.
아... 듣고보니 그렇다. 생선살로 되어 있다는 것 만으로 오뎅이 되는 것은 또 아니다.
그러나 어떠랴. 소시지를, 오뎅을, 형이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천하장사는 "소지지 모양을 한 생선살 간식"이라는 여러 특징을 융합하는 족보를 새로 꾸렸고, 그렇게해서 천하장사는 단일 상품 매출이 1조 5천억원이 넘어가는, 간식 시장의 1인자가 되었다.
요즘은 융합이 대세다. 융합이 아니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어렵다. TV에 출연해서 대담을 펼치는 소위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사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후에 다른 분야도 섭렵하신여 문과와 이과를 넘나드는 통찰력을 뽐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가 - 생각의 탄생이라는 책에서는 이제 “모든 것”을 아우르지 못하면 “아무 것”도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렇게 융합을 하다보면 사람마다 가는 길이 달라질 것이니, 어쩌면 모든 사람이 한 목표를 좇아 1등부터 100등까지 순위가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신이 융합한 분야에서 1등이 되는 길이 열릴 수도 있으니, 대한민국 교육의 병폐라는 줄 세우기를 타파할 방법이 융합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융합이 항상 유용한 결과를 내는 건 아니다. 대학생 시절 써클 후배였던, 지금은 대학 교수인 녀석이 배추와 무의 속간 잡종 교배에 성공했다는 기사가 2022년에 났었다. 이름하며 배무채.
지상에는 토마토, 땅 속에는 감자가 열리는 Pomato가 한 때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두 식물 모두 Solanum라는 같은 종에 Solanaceae라는 같은 속에 속하는 식물이었지만, 그것도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이번에 만들어진 배무채는 서로 다른 속을 교배한 것이니 학문적으로는 Pomato보다 더 뛰어난 성취다.
하지만, 아쉽게도 배무채는 뿌리는 배추를 닮고 잎은 무를 닮았다. 지상은 배추요, 지하는 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학문적으로 큰 성취이지만, 이 융합은 이익이 없다. 농민이나 소비자 입장에서는 실패한 연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는 지상은 배추요, 지하는 무인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게 축적의 힘이니까.
그래서, 어제도, 오늘도 조금씩 쌓아 가는 건 중요하다. 그래도 모든 융합이 매 번 의미있는 결과를 내는 것은 아니고, 그렇기에 내가 만들고 있는 것이 천하장사인지 배무채인지 알지 못해서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다.
오늘도 불안함 가운데에서 벽돌 한 장 더 쌓아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