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회마을에서 처음 지어진 집, 양진당
삼신당 신목에서 되돌아 나와 50m쯤 가면 양진당이 보인다. 이 고택은 하회마을이 생기면서 가장 먼저 지어진 집이다. 삼신당 신목과 마찬가지로 6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지금도 120가구, 22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 가운데 80%가 풍산 류씨이다. 입향조 류종혜 공이 마을을 형성한 이후 지금까지 풍산 류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입향조 류종혜 공이 지은 이 집은 고려 양식이라고 한다. 600년이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건국 시기인 1392년과 맞물린다. 조선 초기보다 고려말에 이 집이 지어졌다고 보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집 구조가 역사적인 사실을 설명한다.
집 기둥이 우선 가운데가 불룩한 ‘배흘림기둥’이다. 배흘림기둥은 고려시대 건축물의 대표적인 양식이라고 한다. 또 기둥 위에 올린 공포가 그러하다. 기둥 바로 위에 공포를 두면 ‘주심포’라고 한다. 이 ‘주심포’ 양식이 바로 고려시대 건축기법이란다. 공포는 지붕의 무거운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둔다. 육중한 지붕의 무게를 기둥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어 공포를 두어 무게를 분산시킨다는 얘기다.
옛날 우리 어머니, 할머니께서 물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똬리를 사이에 뒀다. 이 똬리가 공포 역할을 한다. 그리고 손으로 물항아리를 잡거나 손잡이를 잡았다. 이런 방식으로 물항아리의 무게를 분산시켰다. 그런 방식을 건축에 적용한 것이다.
조선 시대는 주심포가 아닌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두는 ‘다포’양식을 건축물에 적용했다. 결국 이런 건축 구조물을 보면 양진당의 지어진 연대를 추측할 수 있다. 양진당은 주민들의 역사적인 서술과 함께 배흘림기둥과 주심포 양식 등으로 고려시대 건축물임을 증명한다.
양진당에는 지금도 겸암 류운용 선생의 종손 내외가 살고 있다. 종손은 손님이 오면 양진당 대청마루로 올라오기를 권한다. 바깥 현판 ‘입암고택’을 보면서 양진당 대청에 오르면 안쪽에 ‘양진당’현판을 볼 수 있다. 양진당에 오르면 종손이 집안 내력과 마을 이야기를 구수하게 풀어놓는다. 종손을 만나 설명을 들을 기회는 자주 있지 않다.
양진당 오른쪽에는 사당이 2개 있다. 이 사당은 불천위 제사를 모신다. 불천위를 4대 봉사로 끝나는 제사가 아니라 대를 이어서 영원히 모시는 제사이다. 그만큼 불천위 조상의 공덕이 깊다는 얘기다. 양진당 불천위는 겸암 류운룡 선생과 선생의 아버지인 입암 류중영 선생의 제사로 종가에서는 대대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많은 관광객이 고택에 들어와 한번 ‘쓰윽’ 훑어보는 게 전부다.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냥 600년 넘은 옛날 기와집으로 인식할 뿐 하회마을에서 이 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지 못한다. 이 고택은 풍산 류씨 대종가이다. 전국에 흩어진 풍산 류씨의 가장 큰집이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 모두 ‘아~’하며 좋아한다.
하회마을 해설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에 동행 해설이 출발한다. 물론 점심시간인 12시부터 1시까지는 제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