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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동 호서비 Feb 15. 2024

안동문화관광이야기

3. 서애 류성룡, 임란 후 그는 집 한 채 마련할 돈도 없었다.

3. 서애 류성룡, 임란 후 그는 집 한 채 마련할 돈도 없었다.     


안동 하회마을에서 배출된 가장 뛰어난 인물은 서애 류성룡 선생이다. 국민 모두 그의 호와 이름을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전쟁을 총괄했던 서애 선생은 1598년 12월(음력 11월) 정유재란이 끝나갈 무렵에 모함으로 삭탈관직당하고 그다음 해 2월 고향으로 낙향했다. 낙향했지만 서애는 갈 곳이 없었다. 풍산에 있던 집은 허물어져 사람이 거처할 수 없게 됐다. 셋째 아들 유 진과 함께 형의 집인 하회마을 양진당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영의정까지 지낸 고위 관료였지만 서애는 집 한 채 지을 돈이 없었다.     


영의정에다 평안도 도체찰사, 영남, 호서, 호남 등 삼도 도체찰사를 지낸 양반이 어찌하여 돌아온 고향에 집을 짓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가는 의문스럽다. 하지만 그는 전란에 시달린 백성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을 뿐 그에게 돌아온 녹봉조차 제대로 챙기지 않은 청백리였다. 그래서 빈 주머니로 돌아와 형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양진당에서도 잠시 머물렀고 지금 하회 교회 근처에 초가집에서 2년을 살았다. 한때 문중에서 하회 교회 근처를 뒤졌으나  집터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옥연정사, 평일 문을 열지 않아서 대문 틈으로 찍었다. @이호영

이런 서애를 위해 나선 사람이 승려 탄홍이다. 예전부터 서로 알고 지냈던 탄홍은 서애의 낙향을 예견하고 10년 시주를 들여 낙동강 건너 부용대 밑에 작은 집을 한 채 지었다. 하회마을 낙동강 건너 부용대 절벽 옆 숲 속에 지은 집이 옥연정사玉淵精舍이다. 서애는 낙동강 강물이 부용대 밑을 휘감다 돌아 나가면서 작은 소沼의 물빛이 옥처럼 빛나는 모습을 보고 옥연玉淵이라 이름 붙였다. 옥연정사 밑 바위에 지금도 옥연玉淵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처음에는 옥연서당으로 이름 짓고 후학을 가르쳤고 곧 옥연정사로 이름을 고쳤다. 이 서원에서 유명한 임진왜란 회고서인 징비록懲毖錄이 탄생했다.      

옥연정사 밑 바위에 새긴 글자 '옥연玉淵' @이호영
옥연정사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이호영

35년 전 필자가 언론사 시험을 칠 때 상식 문제로 징비록이 단골로 나왔다. 징비록 내용이나 저자, 한자까지 다양하게 문제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자로 취재하면서 이 징비록 원본을 볼 기회가 있었다.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된 징비록을 취재하면서이다. 


류성룡은 1592년 선조 25년부터 1598년 선조 31년까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징비록에 담았다.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 등을 기록했고 단순한 기록을 뛰어넘어 반성하고 또다시 이런 전란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하자는 뜻으로 징懲(혼날 징, 징계할 징), 비毖(삼갈 비), 록錄(기록할 록)을 책 제목으로 삼았다. 전쟁에 대비하지 못해 겪은 국난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하자는 내용이다. 현재 국보 132호이다.    


하회마을 부용대 우측 밑에 '옥연정사'가 보인다. @이호영

징비록을 지은 옥연정사는 하회마을 낙동강 건너편 부용대 동쪽 강가에 있다. 하회마을 솔숲에서 부용대 우측을 바라보면 나무 사이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강가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 한때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기간에 관광객들을 위해 임시 다리를 놓았다. 또 나룻배를 이용해 관광객을 오가게 했다. 임시 다리는 여름 장마 때마다 떠내려 갔고,  나룻배도 독점 운영과 수상 안전을 이유로 운항을 폐쇄됐다. 지금은 나룻배만 모래사장에 덩그렇게 놓여있다. 하회마을 관광 활성화를 위해 나룻배 운행이 다시 시작됐으면 한다. 안동댐 개목나루 황포돛대 운영처럼 시에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옥연정사를 비롯해 부용대. 겸암정사, 화천서원 등을 보기 위해서는 관광객들은 하회마을에서 나와 풍천면사무소 삼거리를 돌아 광덕교 방향으로 6.4km 정도 우회해야 한다. 승용차로도 한 20분 걸린다. 시간과 경제적인 손실이 크다. 관광 활성화와 안전 등에 대한 안동시의 발 빠른 대책이 필요하다. 하회마을을 찾은 관광객이 강모래를 밟고 낙동강을 건너 부용대에 올라 하회마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데 왜 대책을 세우지 않는지 의아스럽다. 강을 건널 수 있는 편의시설이 추가된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관광객이 하회를 찾을 것이 분명하다.  

하회마을 솔 숲 낙동강가에 2018년 이후 나룻배가 운항되지 않고  방치돼 있다. @이호영


겸암정사, 겸암 류운용 선생이 공부하던 곳이다.@이호영
겸암정사 밑  형제바위(큰 바위는 겸암 류운용, 작은 바위는 서애 류성룡을 상징한다)@이호겸

서애 류성룡 선생은 1542년(중종 37년) 10월 1일 외가인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에서 태어났다.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류중영과 안동 김 씨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서애는 4살 때부터 글공부를 시작해 8살 때 맹자를, 13살 때 대학과 중용을 공부했다. 21살 때 퇴계를 찾아가 제자가 됐다. 23살 때 생원시 1등 합격에 이어 24살에 성균관 입학, 25살에 대과에 급제했다. 공조좌랑, 병조좌랑, 이조좌랑, 홍문관 직제학, 형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거쳐 그의 나이 51세 되던 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의정에 올랐다. 평안도 도체찰사와 호서, 호남, 영남을 관장하는 삼도 도체찰사가 더해지면서 실질적으로 전시 군사 업무를 모두 관장했다. 그는 전쟁에 쓰일 군량을 보급하고 군사 업무를 총괄하면서 사실상 전시를 이끌었다.      


정읍 현감에 불과했던 이순신을 삼군수군통제사로 임명할 수 있도록 선조에게 천거한 사람이 서애이기도 했다. 이순신은 서애가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 서울에서 살던 한동네에서 자란 친구 이요신의 동생이었다. 당시 이순신, 권율, 원균 등이 한동네 선후배였다고 한다. 초급 군관인 이순신을 천거해 선조가 전라좌수사에 임명하게 했다. 이순신은 전쟁 동안 삼도수군통제사가 돼 남해와 서해의 제해권을 확보해 바다를 통한 왜군의 북상을 막고 군량미 보급을 차단했다. 당시 종 6품인 현감에서 종 2품인 삼군수군통제사까지 7단계를 건너뛰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현재로 따져봐도 육군 중위에 불과한 초급 장교가 어느 날 갑자기 해군 중장(별 세 개)에 오른 셈이라고 한다. 1594년 군량미 확보를 위해 공물로 바치던 지방특산물을 쌀로 대신하게 했는데 이것은 조선 후기 대동법의 모태가 되었다.


서애는 정유재란이 끝날 무렵인 1598년 12월(음력 11월) 명나라 조정에 무고한 사건을 해명하기 위해 사신으로 갈 것을 요구받았지만 노모가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자 북인들은 사신을 가지 않은 것과 어릴 때 친구인 이순신을 7단계를 건너뛰고 수군통제사로 임명하게 하는 등 지인을 추천했다는 탄핵 했다. 서애가 파직된 날과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날인 1598년 음력 11월 19일 같은 날이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운명적이다. 서애는 이듬해인 1599년 2월 고향 하회마을로 낙향했다.

   

부용대에서 내려본 하회마을 @이호영

 


고향에서 서애는 징비록뿐만 아니라 ‘침경요결針經要訣’이란 의학서도 지었다. 대유학자가 한방 관련 책을 지은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전란 속에 몸이 아파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백성들을 위해 침과 뜸을 중심으로 한 책을 저술해 백성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침경요결 서문에 백성을 위한 서애의 애틋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한자를 아는 사람이 이 책을 바탕으로 침과 뜸을 배워 백성을 치료하고 또 언문으로 번역해 백성들에게 전파되기를 바랐다.      


서애는 고향으로 돌아온 지 9년 만인 1607년 5월 66세의 나이로 풍산 서미동에서 서거했다. 가족들은 그가 서거해도 장례를 제대로 치를 수 없었다. 영의정까지 지낸 고관대작이었는데도 말년에 서애는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집도 절도 없었다는 말 그대로였다. 하회마을 안 충효당은 서애가 서거한 후 후손들이 서애를 기려 지은 집이다. 서애는 충효당에서 단 하루도 살아보지 못했다. 장례를 위해 서애를 아는 중앙의 관계나 지방 유림 등 많은 사람이 십시일반으로 부의금을 냈다. 이 사실은 지금 충효당 안 영모각에 부의기(보물 460호)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서애 선생의 부음을 들은 부원군 이호민이 평생을 청백하게 지낸 선생의 가세를 걱정해 중신들에게 부의를 거두게 했다고 한다. 선생은 장례를 치르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말년을 보냈다. 청백리의 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의 묘소는 지금 안동시 풍산읍 수동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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