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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동 호서비 Jun 03. 2024

안동내방가사이야기 9. 어머니의 기록을 남기고 싶습니다

五友堂 김동호 종손

   안동시 운안동 한 카페에서 오우당五友堂 김근金近 선생 종손인 김동호(71세) 전 교장을 만났다. 의성 김 씨 귀미파 종손인 그는 한 장의 내방가사를 손에 들고 왔다. 종손이지만 그에게는 내세울 종택이 없다. 그래서 집 가까운 카페에서 만났다.   


어머님이 남긴 내방가사 중 현재 집에 있는 유일한 자료다. 집에 있던 내방가사 40여 점 대부분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됐는데 어쩌다 한 장이 남았다고 한다. 그는 어머님의 마지막 흔적인 내방가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고 했다. 김 교장이 들고 온 내방가사는 ‘화전가’이다. 봄에 개나리꽃, 진달래꽃이 필 때 부녀자들이 마을 뒷산이나 명승지를 다니며 지은 가사로 내방가사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흔한 내용이다.  

고 조봉이 어르신 내방가사 '화젼가'  ⓒ이호영

창경조한 소리아 츈몽을 까달르니      창경窓鏡 좋은 소리에 춘몽春夢을 깨달으니

잇디가 어느디요 츈사ᆞ갊월 만강이라   이때가 어느 때요 춘삼월 만강萬康이라

옥연문 깁흔곳아 두견화 만발하갓내   옥연屋椽문 깁은 곳에 두견화 만발했네

젹막한 이신상아 탄식하고 안자스니   적막한 이 신상身上에 탄식하고 앉아으니

남문이 화젼하차 녹아홍상 만으러라   남문南門에 화전놀이 행차行次 녹의홍상綠衣紅裳 

                                                 많으리라

차츔.. 드려가니 극낙세가 ᄭᆞ갗밧치라   차츰차츰 들어가니 극락세계 꽃밭이라

                                                             < 조봉이 내방가사 ‘화전가’>

창경: 창문에 댄 유리

만강: 아주 편안함 

옥연: 지붕 서까래


김 교장의 어머니인 조봉이 어르신은 1923년생으로 영천시 화남면이 고향이다. 안동에 시집온 후 일직면 귀미리에서 평생을 보냈다. 창녕 조 씨의 가풍을 이어받아 농사를 짓고 자식을 키우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내방가사를 지었다고 한다. 사돈지 등을 포함해 100여 편 소장했으나 잃어버리기도 하고 이웃이 빌린 후 되돌려 주지 않았다고 김 교장은 기억한다.          


조봉이 어르신은 가난한 살림살이를 잊기 위해 가사를 짓고 자신의 고달픔을 글자 속에 묻었다. 김 교장도 가난한 살림 탓에 먼 친척의 도움으로 교육대를 겨우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할 수 있었다. 김 교장은 어릴 때 어머니가 낭랑한 목소리로 읽던 내방가사를 지금도 기억한다. 그도 내방가사를 읽을 수 있다며 한 구절 한 구절을 읽어 보인다. 4.4조 운율에 맞춰 가사를 읽는 모습이 아주 낯설지 않다. 내방가사를 듣고 자란 풍월이 엿보인다.      


 ”(어머니께서) 한글은 아마 외할머니로부터 깨치신 것 같아요. 외갓집이 상당히 일찍 개화해서 외삼촌 3분이 다 공직이나 학교에 계셨고요. 딸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한글 교육과 붓글씨 등은 외할머니의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

 어머니의 내방가사 '화전가'를 읽고 있는 김동호 전 교장  ⓒ이호영

         

김 교장은 인조 때 학자 오우당 김근(1579~1656) 선생의 후손으로 8대조 김굉(1739~1816) 선생은 정조 때 과거에 급제한 후 순조임금의 스승을 지낼 정도로 학업이 뛰어났고 5대조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 선생(1825~1812)은 1895년 을미사변과 이어 일어난 단발령을 반대하며 의병을 조직해 을미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또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올리고 일제 강점 반대 격문을 발표하는 등 항일 의병활동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척암 선생이 1912년 돌아가시면서 일제 탄압에 고향에서 살 수 없어서 가족들은 종가를 팔고 영천으로 떠나게 됐고 여기서 선친 김영직 씨와 어머니가 혼인을 맺었다고 한다. 집안이 다시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으나 종가를 찾지 못하고 옆집으로 이사를 왔는데 이 집마저도 6.25 전쟁 때 폭격을 맞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한다. 가난한 살림에 종가를 복원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 지금까지 종택조차 없는 형편이 됐다고 김 교장은 회고했다.     

      

‘친일파 후손은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가 후손은 3대가 망한다’라는 말처럼 김 교장은 가난한 독립운동가 후손의 고단한 삶을 그대로 이어 밟았다. 어릴 때 학교도 못 갈 형편이었지만 공부를 잘하는 그를 보고 친척이 도움을 준 덕분에 교대를 졸업했고 교사로 평생 봉직할 수 있었다. 지금도 종가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에 큰 아쉬움이 남고 언젠가 종택을 복원해야 한다는 마음은 잊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한국국학진흥원 기획 '안동문화 100선'.  이호영. 『어와 벗님네들』. 안동내방가사이야기. 민속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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