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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지만 괜찮은 곳

재촉하지 않는 하와이의 속도

2011년 여름, 하와이에 처음 도착한 뒤 나는 적잖은 당황스러움과 막막함을 느끼게 된다. 신속함과 편리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며 나는 자연스럽게 빠른 생활 속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와이에 처음 짐을 푼 곳은 하와이 첫 일 년을 머무르게 된 홈스테이 집이었다.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받아 인터넷을 연결해 브라우저를 연 순간, 컴퓨터가 고장 난 것 마냥 더딘 속도로 기본 페이지가  떠올랐다. ‘이게 뭐야, 인터넷 속도가?’ 한국의 1/10 정도로 매우 느린 느낌을 받았다. 그다음 잘 도착했다고 부모님께 전화를 하려고 당시 유학생들 중에 잘 알려진 인터넷 전화기를 연결하는데만 몇 시간이 걸렸다. 와이파이 신호가 잡혔다 끊겼다 하며 전화기를 수도 없이 끄고 켰는데 답답함과 떠나온 집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당시 아이폰 4가 출시되었던 시절임을 생각하면 인터넷 전화 없이는 전화를 할 방법이 없었다. (부모님은 스카이프 영상 통화도 나중에야 배우고 설치하시게 되었다.) 그놈의 인터넷 속도…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하와이의 삶은 느리게 흘러간다. 물론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을 열심히 하지만 모두가 과속하고 추월하려고 기를 쓰는 한국의 분위기와는 좀 다르다. 여기서는 모두가 규정 속도를 넘지 않고 유유히 자기 갈 길을 가는 느낌이다. 대표적인 것이 버스이다. 하와이에는 Da Bus가 있다. Da는 영어의 the를 의미하는 하와이식 표현이다. 이 버스에 앉은 사람들은 절대 재촉하지 않는다. 버스는 사람들이 모두 탑승하고 자리를 잡을 때까지 확인한 뒤 떠난다. 아주 천천히 걸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전동휠체어에 탄 사람들이 아무리 여러 명 탑승하며 시간을 지체해도 “거 빨리 좀 갑시다”라든지 “아이 뭐야 바빠 죽겠는데”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휠체어가 버스에 오르면 기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 앞쪽의 사람들을 다 일으켜 뒤로 보내고 좌석을 접어 휠체어를 위한 공간을 만든 뒤 안전장치를 단단하게 고정하고 나서야 출발한다. 고령 인구가 많은 하와이에서는 매일 볼 수 있는 일이다. 자전거를 가진 사람들도 버스에 탈 수 있다. 버스 외부 전면에 설치된 장치에 자전거를 고정하고 버스에 올라타면 된다. 익숙하지 않아 허둥지둥해도 기사님이 내려서 도와주신다. 미안한 얼굴로 버스에 올라타면 아무도 눈치 주는 사람이 없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존중하고 서로 눈치 주거나 비난하지 않는 분위기는 정말 박수칠 만하다. 하지만 신속함과 편리함은?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지각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리 시간표에 맞추고 나중에는 어플로 실시간 버스 위치를 확인하고 도착 예상 시간을 넉넉하게 계산해 나가 있어도 어이없이 버스가 오다가 사라지거나(?) 제멋대로 도착하거나 해서 코 앞에 있다고 생각한 버스를 30분 이상 기다린 적도 허다하다. 처음에는 화병이 날 것 같았는데 그래도 나중에는 적응해서 7-8년 동안 잘 타고 다녔다.


느린 것은 버스뿐만이 아니다. 동네 슈퍼에만 가도 마치 0.8배속으로 영상을 늘려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큰 카트를 끌고 느릿느릿 걸으며 통로를 막는 사람들, 여기에 서로 아는 사람까지 만나게 되면 뒤에 사람이 오든 말든 일단 멈춰 서서 인사를 나누고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다. 그야말로 알로하다. 알로하는 하와이의 기본 정신으로 따뜻한 환영, 사랑, 친절함 등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대도시인 서울 출신의 나와 샌프란시스코 출신인 남편은 가끔 이렇게 친목에 신경 쓰느라 원래 목적은 잊고 줄이 늘어나게 만드는 사람들을 보면 속이 타들어가곤 하는데, 사실 아이러니하게 우리 모두 하와이의 알로하 정신 때문에 이곳에 매료되어 정착하게 되었다.


하와이에 놀러 온 친구들이 가장 놀랍다고 손꼽는 것 중 하나는 보행자 우선 운전 문화이다. 하와이대학교 근처에는 킹 스트리트라는 큰 도로가 있는데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가 몇 개 있다. 처음 하와이에 왔을 때 이 횡단보도를 건널 일이 있었다. 그저 길가에서 기다렸다가 차가 오지 않을 때 힘껏 달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서 있었는데 갑자기 모든 차들이 속도를 줄이더니 멈춰 섰다. 내가 건너려고 손을 든 것도 아니고 걸음을 내디딘 것도 아니고 그냥 서 있기만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하와이에서는 위험한 구역에서의 무단횡단이 아니라면 보행자가 길을 건너려고 서 있을 경우 대부분의 차가 멈춰 서서 길을 비켜준다. 또한 보도와 차도의 경계가 없는 골목길에서 한국의 차들은 아슬아슬하게 보행자의 옆을 비껴 지나가는데 이곳의 차들은 보행자 뒤에서 서행하며 보행자가 비켜날 때까지 기다린다. 보행자가 이보다 더 존중받는 고마운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싶다. 한편, 운전대를 잡고 나서 입장이 바뀌게 되자 신호 대기하다 옆 차에 아는 사람을 만나 창문을 내리고 담소를 나누다 신호가 바뀐 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적을 울리진 않는다. 경적을 울린다는 건 꽤 잘못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조금만 운전을 느리게 해도 금방 뒤에서 빵빵 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고 심지어 심한 욕까지 듣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하와이에서는 위험하게 운전을 하거나 신호를 못 보고 출발을 안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차들끼리 경적을 울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 경적을 울려도 상대 운전자의 주의를 끌기 위해 살짝 소리만 내는 경우가 많다. 세월아 네월아 천천히 가는 낡은 차 바로 뒤를 달려도 기다리다가 기회가 났을 때 조용히 추월할 뿐이지, 경적을 울리며 위협하거나 추월해 지나가면서 노려보고 욕하는 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운전자들끼리의 불문율인 듯하다. 느려도 재촉하지 않는 그들의 답답하지만 알로하가 가득한 삶의 방식이 느껴진다.


하와이의 느린 속도가 사람의 안전과 권리, 선한 의도를 바탕으로 하기에 성격 급한 한국인인 나도 이를 존중하고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참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행정 업무 처리 속도이다. 하와이 주에서 신분증이나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으려면 dmv에 가서 대면으로 신청하고 그 자리에서 발급을 받아야 하는데 아침에 문을 열기 1-2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입구 앞에 줄을 늘어선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도 줄은 하염없이 이어지고 줄지를 않아 하루 반나절은 기다릴 각오를 해야 한다. 게다가 구비 서류도 복잡하고 이민 서류까지 개입되면 2-3시간을 기다려 겨우 창구까지 갔다가 퇴짜 맞고 오는 허탈한 경우도 있었다. 실업 급여 문제나 세금 문제가 있을 때도 다운타운에 있는 사무실에 직접 찾아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뿐 아니라 전화 연결은 더 힘들다. 학교 행정 또한 한국에서는 키오스크에서 3분 만에 발급받을 수 있는 서류도 하와이에서는 근무 시간 내에 직접 찾아가 신청한 후 적어도 5일은 기다려야 한다. 은행은 또 어떠한가. 은행에서 체크카드를 새로 발급받으면 1-2주는 기다려야 집 우편함에 도착한다.


하와이에 와서 차를 렌트한다면 아마 로컬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중 아일랜드 레게 스테이션에서는 느릿하면서 여유롭고 에지 있는 분위기를 잔뜩 풍기는 자와이안 (자메이카+하와이안) 레게 음악이 하루 종일 나온다. 하와이의 속도는 딱 그만큼인 것 같다. 걱정 없이 헤엄치는 바다거북이의 속도. 물처럼 유려하게 흐르는 훌라의 템포. 이 속도에 조금씩 익숙해질 때쯤, 나는 이 느려도 괜찮은 곳에서 마음껏 내 속도로 살아볼 만하겠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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