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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무자비한 파도 놀이

서투르고 현실적인 서핑 입문기

하와이에 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다다. 유년시절 수영장에서 배운 수영 실력을 써먹을 데가 없었는데 여기에서 바다 놀이에 푹 빠지게 된 것이다. 스노클링, 스쿠버 다이빙, 서핑, 바디보딩, 또는 그냥 해변에서 빈둥거리기… 뭐든지 즐거웠다. 하와이의 바다는 비린내가 나지 않았고 모래가 부드러웠고 물이 맑았으며 바닷가에 즐비한 상점들로 왁자지껄하지도 않았다. 섬 한 바퀴를 도는 버스를 타고 노스쇼어의 비치마다 내려서 놀다가 다음 비치로 향하는 비치 하핑을 하던 여름방학은 매일이 휴가처럼 즐거웠다.


유학 초기, 처음 1년을 하와이에서 보낸 후 방학이 되어 한국에 잠깐 들어갔을 때 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고작 1년 살았을 뿐인데 하와이의 파란 하늘, 낮은 구름, 싱그러운 공기와 뜨거운 햇살이 너무 그립고 아쉬웠다. 하와이 앓이에 빠진 것이다. 길든 짧든 하와이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느낀다는 그 감정. 하와이 자연의 빛과 결이 내면 깊숙한 곳을 어루만지는 느낌을 본능적으로 그리워한 것 같다. 무엇보다 바다, 그 파란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냥 떠있고 싶었다.


나는 하와이로 돌아오자마자 로컬 보드 가게에 가서 튼튼하고 잘 빠진 노란색 바디보드를 하나 샀다. 마트나 해변가 편의점에 가면 살 수 있는 스티로폼 재질의 보드보다 대여섯 배나 더 비쌌지만 그만큼 본격적으로 파도 타는 법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에 아깝지 않았다. 나는 모든 해변에 보드를 가져가 놀았다. 파도에 제대로 오르는 법을 몰라서 이미 부서진 하얀 파도에 떠밀려 앞으로 나가는 것조차도 너무 즐거웠다. 파도가 없을 때는 그냥 보드 위에 몸을 걸치고 떠다녔다. 길이가 짧고 모래 위에서 크게 부서지는 와이마날로의 파도에 휩쓸려 모래에 뒹굴어 살갗이 까지기도 했다.


나는 좀 더 서핑을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이미 와이키키에서 즉석으로 서핑 강습을 몇 번 받은 후였다. 와이키키의 파도는 아주 작고 물이 얕아서 수영을 잘 못하는 초보자들도 안전하게 탈 수 있기에 서핑을 처음 배우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초보 서핑 강습에서는 강사들이 파도가 오는 타이밍에 맞추어 서핑보드를 뒤에서 밀어주기 때문에 생각보다 쉽다고 느낄 수 있다. 강사들은 초보 서퍼들로 가득한 복잡한 물속에서도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최적의 타이밍에 안전한 방향으로 보드를 밀어준다. 하지만 서핑을 본격적으로 배우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파도가 아주 작기 때문에 스스로 팔을 저어 파도에 올라타는 법을 배우기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검색을 통해 로컬 여성 서퍼들이 운영하는 서핑 학교를 찾아냈고, 일주일에 한두 번 수업에 가기 전 이른 아침에 강습을 받기 시작했다. 장소는 알라모아나와 와이키키 사이의 일리카이 호텔 뒤쪽 바다였다. 해변에서 다소 멀리 나가야 했지만 파도 크기도 적당하고 붐비지 않아서 꽤 즐겁게 배울 수 있었다. 처음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롱보드에 내 뻣뻣한 몸뚱이를 걸쳐놓고 팔만 움직여 패들링을 하면서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중심을 잡는 것이었다. 서핑보드 컨트롤의 기본이다. 보기엔 참 쉬워 보였는데 실제로 내 서핑보드는 좌우로 달달 떨리며 앞으로 굼뜨게 나아갔다. 발차기라도 해서 앞으로 가고 싶은데 두 발은 서핑보드 위에 있기 때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패들링을 할 때는 상체를 어느 정도 세운 상태로 어깨를 움직여야 하는데 이것 또한 엄청난 지구력을 필요로 했다. 실제로 파도를 타는 시간보다 패들링을 하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파도는 운이 좋으면 두어 개,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패들링 해서 올라타는 것은 하나조차도 버거웠다. 그 외에는 계속 팔을 저으며 물살에 밀려가는 보드를 제자리로 돌려놓거나 주기적으로 파도 시작 지점을 쫓아 움직여야 했다. 파도가 오는 지점을 찾아도 어떤 날은 좀처럼 오지 않는 파도를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어쩌다 운 좋게 스스로 파도를 잡아 타면 스릴 있고 짜릿했다. 파도가 부서지기 전 투명하고 둥근언덕처럼 다가올 때 미리 해변 쪽을 향해 미친 듯이 팔을 저어 기동력을 확보해야 했다. 파도에 올라탔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은 내 보드 뒤쪽 아래에 파도가 들어와 높이 솟구친 상태이다. 이때 붕 뜬 느낌이 듬과 동시에 파도가 롤러코스터처럼 미끄러져 떨어지는 것이다. 떨어지기 전 재빨리 보드 위에 일어서야 한다. 여름에는 오아후 남쪽 해변에 제법 큰 파도가 오는데 파도가 큰 날은 꽤 무섭다. 때로는 중심을 잃고 보드에서 떨어져 파도와 같이 세탁기처럼 휘말리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 파도에 올라타면 하염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 기분은 어떤 말로도 묘사할 수가 없다. 유리처럼 매끈한 수면을 서핑보드가 가장 먼저 가로지르면 그 바로 뒤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따르며 힘차게 보드를 밀어낸다. 물 위를 우아하게 미끄러지다 보면 마치 자연이 숨겨놓은 놀이터를 찾은 기분이다.


서핑은 이렇듯 환상적이지만 크고 작은 상처를 동반하기도 한다.  번은 서핑 강습을 던 중 높은 파도에 휘말려 뒹굴다가 옆에 있던 강사의 보드에 맞아 이마에  혹과 멍이 생기기도 했다. 산호초나 날카로운 바위 바닥에 발을 쓸려 피가 나는  대수도 아니었다. 다친  약간의 트라우마가 생겨 잠깐 서핑 강습을 쉬는 동안 나는  서핑보드로 중고 롱보드를 구입하게 되었다.  보드가 생기고 나니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곳에서 파도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실력은 초보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나는 프리랜서로 레슨을 해주는 친구를 알게 되어  친구의 트럭에 서핑 보드를 싣고 다이아몬드 헤드 비치와 와이키키 비치 사이 곳곳의 새로운 스팟에서 서핑을 배웠다.  핑크색의 마음에  드는  번째 서핑보드도 생겼다.


그러나 차가 없는 나에게 서핑보드는 감당하기 어려운 큰 짐이었다. 석사 졸업이 가까워지며 스트레스를 받게 되자 집 안에 머물며 좀처럼 바다에 나가지 않게 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학비와 생활비 또한 충분하지 않아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버텼다. 그러다가 나는 눈물을 머금고 서핑보드를 둘 다 팔게 되었다. 서핑보드를 팔고 난 뒤 약간의 우울감이 찾아왔다. 학교에 가지 않을 땐 집에서 칩거하며 듣기 싫은 수업의 숙제를 하고 쓰기 싫은 논문을 쓰며 바다를 멀리했다. 그러다가 문득 파도가 타고 싶은 날이 있었다. 버스를 타고 와이키키를 지나쳐 집으로 가는데 어둡게 그을린 피부의 빼빼 마른 십대 소년 둘이 바디보드를 옆구리에 끼고 핀을 손에 들고 버스에서 내려서 바다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방 한 구석에 기대어져 있는 채로 먼지만 쌓이고 있는 노란색 바디보드가 생각이 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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