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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팔지꼰의 교과서라도 좋다

하와이에 살기로 결정한 이유

하와이에 유학을 왔던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 눌러앉겠다고 말했을 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고, 나의 결정에 의해 상처받았고, 화를 냈고, 내 정신 상태를 의심했다. 나는 평생 말 잘 듣는 모범생의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내 속에 보장되지 않은 미래를 위해 인생을 내던질 뜨거움과, 나의 의지와 욕구를 위해 날 기다리는 사람들로부터 돌아설 차가움이 있었을 거라고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힘들었다. 그런 결정을 한 지 8년이 조금 넘었지만 그동안은 그때의 일을 반추해 볼 용기가 없었다. 진심으로 후회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마음 정리를 위해서라도 한 번은 써보고 싶었다. 왜 내가 하와이에 살기로 결정했는지.


복합적인 요인이 모두 제각기 다른 비중으로 영향을 끼쳤는데 직관적으로 두 갈래로 나누어 생각해보기로 했다. 하나는 한국에서의 삶을 떠나고 싶어서, 또 다른 하나는 하와이에서 새롭게 삶을 시작하고 싶어서이다. 아마도 전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나에게는 줄곧 힘들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의 나의 삶은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었는지 부모님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셨는지에서부터 짚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평가는 부모님의 몫이지만 대체적으로 나는 말 잘 듣는 딸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학교에 학부모 상담을 가면 선생님들은 보통 나를 믿음직한 학생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뭐든 시키면 잘하고 또 거기에서 재미를 찾았다. 미움받는 걸 싫어하고 칭찬받는 걸 즐기는 성격 때문에 눈 밖에 나지 않게 행동을 조심했다. 대학교에 들어갈 때도 부모님 입장에선 속 썩이지 않고 등록금이 무료인 사범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부모님이 원하시던 대로 영어 교사가 되었다. 부모님은 나에게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늘 가장 그럴듯한 합리적인 이정표를 먼저 제시해주셨기 때문에 내가 의지하고 따랐던 것 같다. 하지만 한편 내 입장에서는 이미 재수를 하고 있던 형제가 있었기에 나라도 짐을 덜자는 생각으로 했던 속 아픈 결정이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교에 가서도 너무 잘 지냈기 때문에 별로 티는 나지 않았을 것이지만. 부모님이 원하던 딸의 모습에 한 걸음씩 더 가까이 다가갔지만 부모님이 내주신 과제를 수행했다는 느낌 외에는 인생에서 별다른 성취감을 찾지 못했다. 여전히 이런저런 사소한 이유로 부모님의 마음에 완전히 차지 않는 자식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짧은 교직 생활이었지만 간절함이 부족했던 나에게는 과분한 행운이었다. 그래서 벌을 받은 걸까, 나는 초년부터 경력에 비해 과도한 업무와 책임을 맡고 실패와 실수 좌절을 반복하며 하루하루 힘들게 출근을 하고 퇴근만을 기다리는 뜻뜨미지근한 선생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정권이 공교육에서 명분 없는  세우기를 시키기 시작하며 학교 안에서도 학급끼리 학년끼리 경쟁을 하게 만들었고 그런 학교 문화가 숨이 막히기도 했다. 아이들은  사랑스러웠다. 미성숙했던 내가  못해준 것만 생각난다. 어쨌든 교직 생활을 계속할  있을 것인가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했다. 유학 생활은 연구에 대한 흥미는 일깨워줬지만 실용적으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미국 학교들에 지원할  조언을 주셨던 교수님의 말씀이  맞았다. 2언어 연구라는 프로그램 정체성에 맞게 석사 프로그램은 연구 성향이  강했다. 내가 학교로 돌아간다면 유학 전보다  좋은 교사가 되었을까? 장담하지 못할  같았다.


한국에 돌아간다고 가정했을 때 내 앞에 놓인 길은 어느 정도 보였다. 나이가 차면 소개팅을 열심히 했을 거고 부모님이 추천하는 상대와도 만나봤을 거고 적당하게 착한 사람과 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선 임신, 출산 휴가, 육아 휴직, 복직, 새로운 학교 발령 등… 선배 선생님들이 이 길을 걷는 걸 옆에서 많이 봤기에 내 삶도 다르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아이들을 키우기에 여전히 좋은 직업이긴 하다. 아이를 둘 낳고 나서야 부모님이 현실적인 문제까지 고려해서 진로를 조언해주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거였다. 나는 크게 실패한 적이 없었다. 스스로 선택해서 망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과보호였고 어떻게 보면 통제적인 양육이었으며 또 어떻게 보면 부모님의 경험에서 비롯된 현실적인 멘토링이었다. 왜 굳이 힘든 길을 돌아가려고 하는지, 위험을 무릅쓰고 그른 선택을 해서 스스로 망하려고 하는지 부모님은 이해하지 못하셨다. 요즘 말로 내가 가려는 길은 지팔지꼰이었다.


그럼 내가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하와이에 남으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움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출근을 하지 않아도 돼서, 가족과 주변인들의 기대를 충족할 의무가 없어서 자유로운 것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내 존재만으로도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큰 자유를 보장받는 느낌이었다. 먼저 어디서든 어떤 모습으로든 존재할 자유가 있었고 타인의 시선과 평가로부터의 자유가 있었다. 외모와 다양성에 대한 포용이 배어있는 문화 안에서 있는 그대로 존중받을 수 있었다. 체격이 크고 발도 큰 나는 한국에서 옷이나 신발을 사러 갈 때마다 외계인이 된 느낌이었다. 몸이 이미 다 커버린 중학교 때부터 나는 소리 없는 차별과 무시, 언어적 심리적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동양인이 많은 하와이에서도 나는 덩치가 큰 편에 속한다. 하지만 내 사이즈나 외모 때문에 부끄럽거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기 부담스러웠던 적은 거의 없었다. 여성으로서 10년 넘게 내 외모에 가해진 남과 나 자신의 폭력적인 시선과 대우를 생각하면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하와이에 남을 이유가 충분했다. 물론 혹자는 그냥 살을 빼서 체격을 줄이면 되지 않냐고 하겠지만 내가 그 명제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평생 어떻게 고민하고 노력했는지 알게 된다면 쉽게 말할 순 없을 것이다. 말근육이 싫어서 종아리 근육 축소술까지 받은 나였다. 하지만 타고난 뼈대와 발을 깎을 수는 없지 않은가.


또 다른 이유는, 내가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하와이에 다시 살러 오게 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나는 하와이의 아름다운 자연과 따뜻한 사람들, 평화로운 삶의 모습이 좋았기에 이곳은 잠깐 머무르기보다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는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유학 생활을 마무리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하와이 생활의 마지막 장을 닫고 잠깐의 멋진 꿈을 마무리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짧은 해외여행 조차도 관리자의 허락이 떨어져야 할 수 있는 기존 직업은 불필요한 족쇄같이 느껴졌다. 인생은 계속 변화하는 타이밍과 선택의 연속인데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 또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그냥 지나쳐 보내기가 쉽지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구남친 현남편이 존재했기 때문에 현실적인 고민이 가능했었던 것 같다. 단순히 이민 때문에 확신이 없는 사람에게 내 인생을 의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이야 굳은 믿음과 전우애로 다져진 사이이지만 우리는 사실 연애 기간 동안 행복한 시간만큼이나 어려운 시간을 같이 보냈었다. 그가 아버지와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도록 아르바이트를 해서 비행기표를 사주고 같이 고향에 다녀온 적이 있다. 우리가 왔다 간 직후 아버님은 떠나셨다. 상실감과 직장에서의 어려움 등을 겪으며 몸도 마음도 힘들어하던 남편이 바닥을 치고 다시 힘을 내 올라올 때까지 나는 옆에 묵묵히 있었다. 다 풀어낼 순 없지만 수많은 인생의 고비를 같이 넘기면서 우리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믿음이 생긴 것 같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미리 계획했었던 시간이 다가왔을 때는 많이 다투기도 했고 헤어짐을 반복하며 정신적으로 많이 지친 상태였다. 인연인 것 같긴 한데 내가 사랑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하는 건 아닌지, 또는 내 이기적인 선택에 이 사람이 상처를 받지는 않을지 두려웠다.


마지막으로 내 발목을 붙잡은 것은 하와이의 바다였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바다가 가장 그리울 것 같았다. 그만큼 모든 선택지를 다 배제하고 바다만 가지고도 하와이에 남는 쪽을 고를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바다는 나에게 태초의 고향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앞의 모든 이유들을 앞서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이유가 바로 바다였다니. 그래서 가끔은 어떻게 하와이에 살게 되었냐는 질문을 받으면 바다 때문이라고만 대답해도 거짓은 아니라고 느낀다.


아직도 내 결정이 남긴 상처와 단절로부터 나를 비롯 모두가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두의 인생은 그 순간 멈춘 것이 아니라 계속 진행되고 있기에 나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선택에 후회하거나 집착하면서 현재와 미래를 낭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용서받지 못할 줄 알았던 부모님으로부터 아기용품이 가득 담긴 소포를 받게 되고, 한국에서 친구들이 하나둘씩 보러 와 주고, 새로 시작한 대학원 박사과정에서는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고 커리어를 쌓게 되었다. 대학 동기들은 이제 경력 15년이 다 되어 가는데 나는 아직도 파트타임 강의를 하는 학생이긴 하지만 과거의 나를 옭아매던 정체모를 정신적인 구속에서 스스로 벗어났다는 점이 다행이고 참 잘 된 것 같다. 버리고 떠나온 것이 아니라 잠시 혼자 서기 위해 멀어졌던 거라고 나는 느끼고, 다른 이들도 알아주었으면 한다. 마음 한편에 언제나 늘 그립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하는 건 내 업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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