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소매 끝을 당긴다.
소복이 쌓인 추위 밑에서 봄이 움튼다.
언젠가 감쌌던 공기가 피어오른다.
이곳에 서서, 그저 가만히 바라만 봤을 뿐.
이내 계절은 내게 돌아왔다.
만물이 지나쳐 저만치 앞서 나갈 때
시간이 소매 끝을 당긴다.
가득히 쌓인 먼지 밑에서 발돋움이 움튼다.
지난 시간에 비해 바라는 바나 욕심이 큰 걸 자각하고 있다. 어렸을 적엔 학교 수업을 따라가면 발맞춰 성장했다. 돌이켜보면 굉장히 빠르게 지난 느낌이지만, 오늘날 모습은 12년의 시간이 쌓인 산물이다. 대학 시절을 총합하면 16년이다. 긴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사회인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영상디자인을 경험한 기간은 짧다. 단기간을 전문가의 수준과 닮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다. 그럼에도 바라며 조급한 건 어쩔 수 없다. 근미래엔 타인보다 앞서고 우수해야 도태되지 않는다. 하지만 소모했던 시간은 주위보다 적다. 급한 마음에 싹이 튼 욕망이다. 자연스러웠던 시간은 점차 역설적으로 흐르게 됐다.
혼자뿐인 세계에서 시간 감각은 무뎌진다. 홀로 고통을 감내하며 오류를 고친다. 참조할 수 있는 건 인터넷에 게재된 전문가의 작업물뿐이다. 그들의 작품을 보면서 공부하고 훈련에 매진한다. 매일을 같은 일상으로 보내다 보면 시간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급하게 뛰어가는 어제의 모습이 내일이 됐고 어제의 기억이 오늘 떠오르지 않는다. 외부와 단절된 혼자뿐인 공간에서 내 시간은 서서히 멈춰갔다. 그 속에서 욕심은 계속 커져갔다.
천천히 함께 할 줄 알았던 시간은 손끝을 떠났다. 느리게 흘렀던 내 세상은 외부와 동조됐다. 더 큰 세계를 맞이하기 위해 매일을 준비에 임했다. 내 시간은 언제나 내 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눈 떠보니 시간은 저만치 앞서있다. 열심히 준비하고 난 뒤에야 내 시간은 흐를 줄 알았다. 잘하고 싶다는 욕심만을 키우고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았다. 비루한 일상의 끝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새 처음 맞았던 계절이 돌아오고 있다. 푸르렀던 녹음이 지고 땅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튼다. 미숙했던 때와 달리 시간은 꼬리만을 보인다. 앞선 시간과 다시 한번 함께하기 위해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더 이상 서서히 멈추지 않으며 천천히 흐르지도 않는다. 시간의 걸음대로, 보폭을 맞추기 시작한다. 쌓아왔던 욕망을 현실로 만들 수 있기를 소망한다.
시간이 소매 끝을 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