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다는 건 무뎌진다는 것.
빠르게 달리는 풍경이 뒤섞이며
바라보는 속도 함께 뒤엉킨다.
어젯밤 꿈의 풍경도, 오래 전의 실수도,
한데 모여 감정을 어지럽힌다.
눈을 감으면 모두 멈추고 잊힌다.
잊혀진다는 건 무뎌진다는 것.
나 혼자만이 멈춰있다.
좋지 않은 일은 한차례에 찾아온다. 이를테면 자주 쓰는 토너와 로션 세트가 수분 크림과 함께 동날 때, 자주 사용하지 않는 생활용품의 구매 시기가 맞물린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진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았던 일상에 빈곤은 갑작스레 들이닥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위기도 유사하다. 일반적으로 영감이 떠오르지 않거나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 곤란한 와중에 컴퓨터나 프로그램의 에러로 곤욕을 치른다. 정신적 압박으로 몰릴 때, 채용 불합격과 같은 불운이 피어오른다. 이럴 때면 자랑스럽게 느껴졌던 작업물들도 허점이 유독 드러나고 이전과 같은 감정이 나타나지 않는다. 주변 만사가 밉게 보이고 과거와 미래가 원망스러워진다. 그리곤 점차 자기부정을 시작한다.
갑자기 찾아온 자기부정은 눈덩이처럼 커져 간다. 실낱같은 낙관적 미래관을 유지하려 긍정적 자세로 일관했기에 반동은 크다. 한 번 시작되면 구렁에 빠져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 타인의 삶을 스스로에게 비춰보며 단점을 드러내고 긁어낸다. 수치가 주는 썩은 맛을 음미하면서 토악질을 반복한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내일과 모레, 이레나 닿지 않는 미래까지 이어진다. 평소 원활하게 이루어질 작업임에도 지체가 발생한다. 이 결과도 맞물려 골은 깊어진다.
지속되는 추악한 열등감에도 자기 연민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설정한 이상에 빗대어 이루어진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기에 발생한 산물이다. 아슬아슬한 외줄로 일상을 이어가던 와중에 가끔씩 발생하는 변수는 저 밑으로 떨어뜨린다. 감정적인 동요로 흔들리지만 나에게서 발생한 원인임을 파악하고 외부 환경을 탓하진 않는다. 자신을 가엾게 여기거나 주위를 불평해도 갑작스레 찾아온 불운의 사건들은 해결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스스로 수습해야 한다. 그러나 생각처럼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끔찍한 자기 비하는 말라붙은 껌처럼 엉겨 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비교 대상과 비슷해지기 위해, 열등감의 원인을 뛰어넘기 위해 몰아세우다 보면 감정은 잊힌다. 기대했던 현실에 부응하지 못한 완벽함은 또 언젠가 앞에 나타나 다시 잊히기를 반복하겠지.
잊혀진다는 건 무뎌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