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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순범 Sep 18. 2023

<해수의 아이>, 질서(Cosmos)

삶의 허무 대신 삶의 가치

야심의 애니메이션


와타나베 아유무 감독의 영화 <해수의 아이>는 앞서 질문들의 해답이 될 수도 있는 영화이다. 또한 애니메이션을 최대한 애니메이션답게 만든 야심 가득한 작품이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바다의 풍경과 물의 질감은 핵심주제와 연결되며 다른 영화들과는 다른 창의적인 방식이다. 전위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만화적인 표현방식은 관객을 압도하는 측면이 있다.


<해수의 아이>의 이야기는 전형적으로 일본만화에서 나타났던 ‘Boy meets girl’의 구조를 뒤바꿨다. 영화의 이야기는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만나 변화하는 구조이며 하나의 성별이 아닌 하나의 존재로서 상징을 나타낸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가 만나는 것이 아닌 세상, 그 자체를 만나 변화하는 이야기이다.


“별의 씨앗, 별의 아이, 그리고 별이 탄생한 이야기”라는 영화의 첫 구절은 애초에 이 이야기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나타낸다. 이 이야기는 결국 생명의 탄생과 반복이라는 테마가 중심이다. 그것이 곧 ‘질서(Cosmos)’이며 거대한 우주의 섭리 속에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자 대답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해수의 아이>는 중학생 소녀 ‘루카’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영화는 시작한다. 루카는 활기찬 소녀이다. 달리면서 하늘을 날며 핸드볼을 하며 나타나는 등장은 루카의 성격을 나타내는 장면이다. 하지만 루카는 인간관계에 서툴러 일부러 반칙을 저지른 선배에게 고의로 얼굴을 가격하는 행동을 저지른다. 때문에 핸드볼을 그만두게 되는데 이는 루카가 조직을 겉도는 존재이며 세상에 내 편이 없는 것 같은 무기력이 지배하고 있다. 결국 루카는 하늘을 날 수 없다.


그런 루카가 만난 소년은 ‘우미(海)’와 ‘소라(天)’이다. 우미는 흑인으로, 소라는 백인으로, 루카는 황인으로 설정된 이야기는 캐릭터만으로 만물의 총체를 설명한다. 캐릭터의 설정만으로 루카는 바다와 하늘의 사이에 있는 육지처럼 보인다. 결국 <해수의 아이>는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묻는 이야기이다. 기억의 단편은 결합되어 엮이고 커지며 생각과 사고가 된다. 흡사 별이 탄생하여 모이고 은하가 탄생하는 과정과 똑같다. 이처럼 인간과 우주를 비교하여 설명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시적 수사처럼 보인다.


소라는 운석을 찾게 되고 자신이 죽기 전에 이를 키스로 루카에게 건넨다. 그리고 이를 우미가 건네받게 되며 새로운 우주가 탄생하게 된다. 이는 생명의 탄생과 똑같은 과정이다. 정자(소라)가 생명(운석)을 가지고 난자(우미)와 결합하게 되며 어머니(루카)의 역할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과정에서 장소를 제공한 고래는 곧 바다의 상징이며 생명의 근원지이다. 고래에게 나타나는 다산의 상징같은 그림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체이며 바다가 있는 별은 자궁”이라는 영화의 대사처럼 생명은 죽음을 통해 계속 재탄생할 것이다. 결국 탄생은 우주와 우주가 만나 또 다른 우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렇게 별이 탄생하며 생명이라는 불꽃이 탄생한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아름다운 빛을 내뿜는다. 어차피 꺼질 빛인데 왜 빛나는 것일까. “빛나는 것들은 누군가 발견해 주길 바라는 거야”라는 영화의 대사처럼 또 다른 별을 찾기 위해 빛난다.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우연한 순간에 이루어져 과거나 미래의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존재한다. 이는 곧 과거의 반복이며 태어난 이유이고 세계의 비밀이다.

질서(Cosmos)의 영화


삶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의 조화이다. 같은 일을 각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바다와 육지생물이 곧 우주의 일부분인 것처럼 차이가 없다. 생물은 모두 같은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우주의 것이다. 이 세상의 만물은 모두 같은 물질이다. 이 같은 측면에서 우주와 인간은 똑같다. 모든 것은 하나의 일부분이다.


결국 우리는 우주에서 와서 우주로 되돌아갈 운명을 지닌 존재이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태어나면서 동시에 죽어가기 시작하는 서글픈 존재이다. 그렇다면 거대한 자연의 섭리(海天)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인간은 손바닥 안에 세계의 비밀을 쥐고 살아가고 있다. 세계는 다양한 형태를 통해 힌트를 주고 있다. 결국 우주의 질서(Cosmos) 앞에 자신의 손바닥이 쥐고 있는 나의 이야기가 제일 중요하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믿는 자는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한 소녀가 자기 자신을 믿는 이야기이다. 자기 자신을 믿는 그 순간 소녀는 다시 날 수 있다.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루카는 새로운 동생의 탄생의 탯줄을 자른다. 결국 우주로 되돌아간 우미와 소라가 동생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세계는 이처럼 반복된다. 그리고 루카는 바다를 거닐며 가장 소중한 약속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행동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나’로서 세상을 잘 살아가겠다는 다짐이다.

인간이라는 우주. 우주라는 바다. 바다라는 별. 별이라는 인간. 생명의 탄생과 회귀. 그것은 전체이자 일부이며 그 중심에 자기 자신이 있다.


시간이라는 공간(Space), 허무라는 세계(Universe), 삶이라는 질서(Cosmos)


“매일 밤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내가 우주고 내가 바람이다”


크리스 벨의 <I am Cosmos>라는 노래 가사 중 하나로 우리 인간의 본질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결국 인간은 하나의 소우주이다. 그리고 이 망망한 우주와 막막한 인생에서 무(無)를 어떻게 견딜 것인지는 필생의 과제이다.


우리는 이 광활한 망망대해 속에서 삶의 허무 대신 삶의 가치를 물을 필요가 있다. 아폴로 11호에 탑승한 인원은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마이클 콜린스로 총 3명이다. 그중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은 달 착륙선에 탑승하여 달을 밟았고 마이클 콜린스는 모선을 지켰다. 사람들은 콜린스에게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부럽지 않냐고 질문했다. 콜린스는 이렇게 말했다.


“30억 명의 사람들이 암스트롱과 올드린을 보고 있을 때 나는 완전히 혼자였고 너무 좋았다. 심지어 따뜻한 커피까지 마셨다”


지구에 도착 후에 암스트롱은 세간의 지나친 관심을 받아 스트레스를 받아 힘들어했으며 올드린은 암스트롱보다 달을 먼저 밟지 못했다는 질투심에 괴로워했다. 하지만 콜린스는 꽤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무병장수하다가 얼마 전 평안한 안식 속에 잠들었다.

결국 무(無)를 견디는 방법은 ‘나 자신’으로서 끝까지 살아가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슬픈 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끝까지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실존하는 삶의 이유이다.


“코스모스는 과거에 있었고, 현재에 있으며, 미래에 있을 그 모든 것이다.”


칼 세이건의 책 <코스모스(Cosmos)>에 나오는 이 말처럼 삶은 과거, 현재, 미래에도 쭉 있을 것이다. 시간이라는 공간(Space)과 허무라는 세계(Universe)에서 삶이라는 질서(Cosmos)를 지켜나가는 것이 곧 우주이며 인간이다. 빛나는 별이라고 거만할 필요는 없으며 티끌만 한 존재라고 허무해할 필요도 없다. 우린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그 자체로 우주인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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