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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순범 Nov 28. 2023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럼에도 살아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전작 <바람이 분다> 이후 무려 10년 만의 신작이다. 혹자는 이 영화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가장 사적인 영화라고 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현재 82살을 앞두고 있는 만큼, 좋든 싫든 자신이 노년에 느낀 감정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실제로 이번 작품은 이전 작품과 다르게 자신의 어린 시절이 많이 반영되었다.



혹자는 난해하다고 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탑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작들을 보지 못했다면 따라가기 어렵다. 또한 일본의 근현대사가 일정 부분 반영되어 있고 극 중 시간이 2차 세계대전이기 때문에 역사를 잘 모른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심하게 비판하는 사람은 스토리와 영상의 불일치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앞의 사정을 전부 몰라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개인사를 몰라도, 일본의 근현대사를 몰라도 이 영화는 그 자체로 걸작이다. 영화를 조금 사회와 떨어뜨려서, 영화 그 자체에 집중하고 싶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한 소년의 성장 영화이자 가족 영화이다.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소년 '마히토'는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새엄마를 만나지만 마히토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날이 힘들어한다. 그때 그에게 알 수 없는 왜가리 한 마리가 나타나고, 이는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실마리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마히토는 사라진 새엄마 '나츠코'를 찾기 위해 왜가리의 안내에 따라 이세계로 향하는 문을 통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택에 있는 탑에 대한 비밀을 마주한다.



직접적인 제목, 간접적인 내용


이 영화는 제목부터 직접적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말은 이 영화의 핵심 주제이다. 보통 영화가 이렇게 대놓고 자신의 주제를 밝히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내용은 직접적이지 않다. 마히토의 엄마가 선물로 건네준 책의 제목으로 등장할 뿐, 대사로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제목은 첨언에 가깝다. 영화는 '한 소년은 이렇게 살았다'라고 말하고, '그렇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덧붙여 질문한다. 우리가 영화에서 볼 것은 이 질문으로 향하는 한 소년의 성장과 태도이다.



마히토는 죽고 싶은 소년이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3년째 미국의 공습이 일본 도쿄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마히토의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에 불길이 번지기 시작하고 마히토의 아빠는 서둘러 병원으로 향한다. 마히토는 그때 잠옷을 교복으로 갈아입고 병원으로 출발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다. 마히토가 병원으로 향하는 장면을 거센 불길로 인물의 모습까지 일그러진 형태이다.

그 순간 마히토가 느낀 감정은 무력감이다. 병원이 불타고 있는 상황에서 마히토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죄책감이다. 마히토는 잠옷을 교복으로 갈아입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는 만약 자신이 그대로 잠옷으로 병원으로 뛰어갔다면 어머니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전쟁이 시작되고 4년째 마히토는 아버지와 함께 도쿄를 떠나 어머니의 고향으로 향한다. 역에 도착한 마히토는 새엄마 '나츠코'를 만나고 '엄마와 똑같이 생겼다'라고 생각한다. 마히토는 나츠코에게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나츠코가 싫다. 어머니의 자리를 뺏어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나츠코를 보고 어머니가 떠오른다. 어머니 '히사코'와 자매 관계인 '나츠코'는 마히토에게 그리움을 주는 존재이다. 마히토가 나츠코의 배를 만지며 임신한 아이를 느낀 순간, 그는 자신의 어릴 적을 떠올린다.



양가적인 마음 때문에 혼란스러운 마히토는 나츠코를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는다. 나츠코를 만나도 굉장히 딱딱하게 인사하고, 어머니가 아닌 '이모'라고 부른다. 마히토의 차가운 반응을 나츠코도 내심 알고 있다. 그녀는 어머니로 인정받기 위해 모든 것을 다했지만, 자신의 언니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학교를 향한 마히토는 유별난 전학생이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차를 타고 등교하고 공동체 생활에 어울리지 못한다. 이내 다른 학생들과 싸우고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다. 그리고 스스로 돌로 자신의 머리를 찍는다. 이 자해는 단순히 학교에 가기 싫어서 한 행동이 아니다. 마히토는 죽고 싶다.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를 따라가고 싶다. 학교에 우정은 없으며, 아버지는 군수공장 운영하느라 관심이 없고, 나츠코는 어머니를 대신할 수 없다. 그는 세상이 싫어 어머니 곁으로 떠나고 싶은 소년이다.



죽음의 세계에서 역설적으로 마주한 것


왜가리의 부름과 함께 나츠코의 실종으로 마히토는 탑으로 향한다. 마히토가 탑으로 향한 표면적인 이유는 나츠코를 찾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왜가리의 말을 따라 어머니를 다시 보고 싶기 때문이다. 결국 탑으로 향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모험도 있지만, 어머니를 보기 위해 죽음(명계)으로 향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 지점에서 그가 죽음의 세계에서 역설적으로 삶의 의지를 되찾는다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마히토가 탑의 세계에 도착하여 마주하는 문의 새겨진 문구는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이다. 여기서 '나'는 죽음이다. 만약 마히토가 문 너머에 있는 무덤으로 움직였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젊은 키리코가 나타나 마히토를 구하고 함께 탈출한다. 마히토가 키리코의 배를 밀면서 파도에 의해 흉터를 덮고 있던 반창고는 떨어진다. 아버지는 마히토의 흉터를 보고 머리카락을 길러서 가리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마히토는 흉터를 드러내고 마지막 파도를 마주한다. 즉 그는 자신의 상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죽음에 맞서는 순간 역설적으로 생명을 마주한다.



키리코의 집에서 와라와라가 하늘로 올라가는 순간 펠리컨이 습격한다. 히미가 나타나 펠리컨을 쫓아내지만 동시에 와라와라에게도 불길이 번진다. 마히토는 히미에게 그만하라고 소리친다. 마히토가 와라와라를 각별히 신경 쓰는 이유는 자신의 동생, 새엄마의 아이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마히토는 동생이 태어나게 돕고자 지키려고 한다. 와라와라의 형태가 동글동글한 이유도 태아 혹은 정자를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어가는 펠리컨의 말에 따르면 이 세계는 생태계가 무너져 도저히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이다. 탑의 세계를 창조한 마히토의 큰 할아버지는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펠리컨을 외부에서 데리고 왔다. 탑의 세계는 곧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롭다.



마히토는 왜가리와 함께 여행을 떠나지만 대장간에서 앵무새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처한다. 그 순간 히미가 불에서 나타나 마히토를 구출한다. 마히토가 히미에게 나츠코가 어디있는지 물어보자 히미는 나츠코를 '내 동생'이라고 호칭한다. 그 순간 마히토는 히미가 자신의 어머니인 것을 알 수 있다. 히미의 집은 따뜻하고 풍요롭다. 그녀가 만든 빵과 잼은 어릴 적 어머니의 음식과 똑같다. 만약 마히토가 이 세계에서 살 수 있다면 히미의 집은 최고의 공간이다. 마히토가 큰 할아버지를 이어 받아 세계의 창조자가 된다면 현실을 잊고 어머니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악의마저 품는 마음


그 지점에서 마히토가 큰 할아버지를 만나는 두 장면이 중요하다. 첫 번째 마히토가 큰 할아버지를 만나는 장면은 도형 돌로 이루어진 탑 위에 하나를 올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마히토는 이 돌은 악의로 물들었다고 말한다. 돌은 탑의 세계를 창조하는 근원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머리를 때린 도구이다. 마히토가 결정을 내리지 않고 눈을 뜨자 옆에 앵무새가 칼을 숫돌로 갈고 있다. 이처럼 돌은 죽음의 이미지가 깃들어 있다.

두 번째 마히토가 큰 할아버지를 만나는 장면은 조건이 다르다. 큰 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악의에 물들지 않은 돌을 건네고 쌓으라고 한다. 첫 번째 만남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마히토가 이번에 거절한다. 친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두 장면은 정확히 대비되어 마히토의 변화를 보여준다. 마히토는 처음에 탑을 쌓을 수 없는 이유로 악의가 물든 돌을 말한다. 즉 세상이 문제이기 때문에 나는 행동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이는 마히토가 가진 세상에 대한 환멸을 반영한다. 그러나 다음에 정반대로 악의에 물들지 않은 돌을 주었지만 탑을 쌓을 수 없다고 거절한다. 이는 세상이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말이다. 즉 돌로 자신의 머리를 내려친 사람, 내가 악의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마히토의 변화는 바로 자신의 잘못을 책임을 지기 위한 태도에 기반한다. 그는 크게 세 가지 잘못을 했다. 나츠코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고, 왜가리에게 화살을 쏘고, 돌로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 그 중 마히토에게 가장 바로잡고 싶은 것은 나츠코를 새엄마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마히토는 나츠코를 구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가가고 '엄마'라고 부른다. 그리고 왜가리와 키리코, 히미를 만나며 우정을 쌓았다. 특히 왜가리와 그가 탑을 모험하며 쌓은 우정은 고결하거나 숭고하지 않다. 오히려 지난한 다툼 속에서 피어올랐다. 어머니 '히사코'가 마히토에게 남긴 책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출발한 이 여정은 이렇게 성장과 우정으로 귀결한다.



그럼에도 어떻게 살 것인가


마히토는 큰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탑의 창조자가 될 수 있다. 창조자가 되면 세상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 현실의 끔찍한 전쟁은 없고,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어머니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로 돌아가는 선택은 자신의 과오를 책임지며 다시 우정을 쌓아나가겠다는 성장과 맞물린다. 마히토의 성은 '마키'인데 일본어로 '나무(木)'이다. 즉 마히토는 '돌'이 아닌 '나무'의 사람이다. 왜가리와 우정을 쌓을 수 있는 결정적 계기도 부리의 구멍을 메운 나뭇조각이었다. 결국 사회와 개인은 비극은 되풀이될 것이다. 전쟁은 계속 일어나고 소중한 사람들과 이별은 필연이다. 그럼에도 어떻게 살 것인지 영화는 마히토의 이야기를 통해 질문한다.



마지막 마히토와 히미의 이별 장면에서 히미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히미는 나츠코와 마히토를 만나며 자신의 운명을 인지한다. 자신은 병원에서 전쟁의 포격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남편은 자신의 동생과 결혼할 것이다. 하지만 히미는 다시 현실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자신이 없으면 그토록 사랑하는 마히토는 태어날 수 없다. 히미는 불의 힘을 사용하지만 전쟁의 화마로 세상을 떠난다. 불은 히미의 죽음이지만 동시에 마히토의 탄생이고, 그에게 행복한 미래를 이어준다. 그 모든 것을 알면서 현실로 돌아가는 히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마히토가 어머니를 무척 그리워하는 것도 히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주었던 각별한 사랑 때문이다.



마히토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 순간 탑의 모험을 서서히 잊기 시작한다. 왜가리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기억에서 사라진다. 점차 히미를 만나서 밥을 먹은 것도 잊을 것이다. 이처럼 비극은 늘 가까이 있고 행복은 점점 사라진다. 하지만 마히토는 다시 나아갈 것이다. 모험으로 스스로 자신의 과오를 책임지고, 우정을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겐 '불(어머니)'과 '자연(왜가리)'가 늘 곁에 있다. 이처럼 사랑과 우정은 죽음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다시 새로운 형태로 우리에게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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