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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좋은나 Jan 18. 2024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나와 결혼을 결심한 그 남자

지인과 함께 술을 먹던 중이었다.


그렇게 사랑해 마지 않는 전남편이자 동거남이지만

나는 그와 첫 뽀뽀를 하며 울리는 종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고,

그에게서 운명의 남자를 느낀 적도 

그를 밝게 비추는 후광을 본 적도 없었다.


그는 그냥 내가 사랑한 남자친구 중 하나였고, 

내가 결혼을 생각하던 시기에 만나던 남자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결혼을 하자 했고, 그가 수락하며 우리는 연인에서 부부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나의 첫 뽀뽀를 하고,

'이 아이와는 좀 오래 만나겠다.' 라는 생각을 난생 처음 했다고 한다.


그리고 1n년이 지난 지금.

그를 만나 고생하며 사는 동안 단 한번도 듣지 못한 이야기를 그가 이 술자리에서 했다.


"사실 이 얘긴,  XX(내이름)에게도 단 한번도 말 한 적 없던 건데." 

하고 운을 띄운 그가 나의 지인에게 말했다.


"나는 XX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잠깐 운명, 같은 그런 걸 느꼈어."


"에잉?"

호기심에 그에게로 잔뜩 기울어져 무어냐고 묻던 나를 그는  부담스러워 하며 밀어냈다.


결혼 생각이 없던 그가 나와 결혼을 생각하게 된 그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우리 엄마 아빠에게 남자친구인 그를 소개 시킨 것은 우리가 사귄지 1년이 딱 지났을 때였다.


"엄마, 나 내년 봄에 이 남자랑 결혼 할 거야."


남자친구를 소개시키기도 전에 나는 엄마 아빠께 이런 식의 통보를 했다.


워낙에 제 할일을 알아서 하고, 엄마 아빠 말이라면 일단 듣지 않고보는 딸이지만.

인생의 반려를 맞이하는 결혼까지 이런 식으로 통보를 해오자 엄마 아빠는 나름 분노하셨다.


그는 나보다 여섯살이나 많으면서, 직업도 안정적이지 않고, 모아둔 돈도 없거니와 집안에도 돈이 없는 그저 그런 남자였기 때문에 일단 별로라는 색안경이 씌여져 있었다.


저러다 말겠지, 좀 만나다 말겠지.

그동안의 나의 남성 편력을 아는 엄마 아빠였기에 말 없이 지켜보던 중에 

청천벽력을 아무렇지 않게 결혼 하겠다는 말을 통보한 딸과 

그런 철부지와 짝짜꿍이 된 딸의 남자친구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렇게 좋지 않은 감정으로 첫 만남을 가진 자리.


한 상 가득 차려진 일식집에서 코스로 나오는 정찬을 시켜두고

아빠가 먼저 이래서 네가 사위론 마음에 안들고

저래서 네가 내 딸의 반려가 되는 건 성에 차지 않는식으로 말씀을 하셨다.

물론 아빠는 천년의 약속이라는 그 때 잠시 나왔다가 사라진 술을 시키셔서 남자친구였던 그에게 따라주셨다.


"지금 내 말이 서운해도, 사람 앞 일은 모르니까.

이 술처럼 자네들이 인연일 수도 있으니 너무 서운하게는 생각하지 말게.

부족한 부분은 채워가면 되지 않은가." 하시며.


아빠의 말씀이 끝나고 젓가락을 들자 

그 때까지 별 말씀 없이 묵묵히 식사만 하던 엄마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면서 

"결혼을 누가 통보를 해요. 집안일인데." 라며 운을 떼셨다.


그리고 "나도 너 맘에 안들어,  이런 네가 우리딸 만나는 거 싫어."

대충 이런 식으로 내 남자친구를 공격했고, 그는 고맙게도 말없이 묵묵히 그 말을 모두 견뎠다.

그리고 엄마 아빠의 말씀이 모두 끝나고 그에게 발언권이 넘어가자 그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제가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은 결혼을 승낙받으러 나온 게 아닙니다."


그때 황망한 얼굴이 된 엄마 아빠의 얼굴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있다.


"결혼은, 두 분 말씀처럼 양가 어르신들의 허락 하에, 

어른들께서 정해주시는 좋은 날짜에 축복 속에서 하는 게 당연히 맞습니다."

라고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그러자 그 때부터 민망한 엄마 아빠는 내게 눈총을 쏘아대며

"그럼 그렇지, 저게(딸인 나) 또 설레발 친거지! 지혼자 오버 한거지" 했다.


"그렇다고 제가 XX이랑 결혼을 안하고 연애만 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장거리 연애다보니 집에 못들여 보내는 날이 많아서

어머니 아버지께서 엄한 놈 만날까 걱정하실까봐,

그리 나쁜 놈 만나는 건 아니니 걱정 마시라고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라고 정말 예의바르고 정중하지만 소신있게 말을 했다.


그 날부터 그는 우리 집에서 내 남자친구로 공식 인증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조건은 

당신의 딸을 높이 평가하는 엄마 아빠가 생각하는 사위의 조건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세월이 가면 이별이라도 하겠거니 두고보자, 는 심정으로 엄마와 아빠는 지켜보셨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내가 결혼을 하겠다고 말한 날을 6개월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나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그때 남자친구인 그는 미술감독으로서 한창 촬영을 진행하며 눈코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남자친구는 솔직히 다녀가기 어려운 사정을 내게 전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수긍하지 못했고 반쯤은 실망 반쯤은 분노했다.

나의 그런 극성스러움에 경보를 느낀 것인지

그는 지방 로케 촬영을 하던 와중에 김포 공항으로 가 마지막 비행기에 올라 부산으로 와 장례식장을 밤 늦게 방문했다.


"그때, 하얀 상복을 입고 두 팔을 걷어부친 채 손님들 응대하는 XX이 모습 보고.

이 친구하고 결혼하면 잘 살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할머니 장례식장에 몸에 맞지 않는 어설픈 양복을 꿰어입고 나타난 그는

바빠서 못온다는 내 말을 전해듣고 기대하지 않던 아빠를 감동시켰고 점수를 땄다.

그 때부터 그는 온 집안 식구들에게 인사를 드렸고 집안의 맏딸의 예비사위가 되었다.


그리고 그 날 하얀 상복을 입고 바쁘게 장례식장을 쏘다니던 내 모습에서

그의 반려로서 그에게 각인되었다.




사람들마다 결혼을 결심하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만난지 백 일이 지난 내 전화번호조차 외우지 못하던 시크하다 못해 멍청한 남자에게

왜 그리 결혼을 갈구했는지 나도 모를 일이지만 나는 그에게 결혼하자고 했다.


착하고 순한 남자지만 고집있는 모습이 좋았던 건지

키는 작아도 내 스타일로 생긴 그의 겉모습이 좋았던 건지

보통 평범하지 않은 그가 하는 일에 호기심을 느낀 것인지 

지금도 왜 이 남자와 결혼을 결심한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는 마흔에 띠동갑이랑 결혼해야지 하는 막연한 목표는 있었지만,

결혼을 가까이 생각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룸메이트가 결혼으로 떠나자

그 빈자리를 나로 채우려고 한 것일 수도 있고.

돈이 없어도 안정적이지 않은 직업이라도 결혼을 하자고 하는

대찬 나를 믿고 의지하려고 결혼을 결심한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는 일 잘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자신의 운명을 걸게 된 것 같다.



참 단순한 결론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거창하지 않은 이유로 결혼을 했다.



나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해왔고 아이도 셋이나 낳았다. 

지금은 비록 이혼을 하고 동거 중이지만 우리는 언젠가 하게 될 재혼을 꿈꾸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운명.

결혼을 할 운명.

그게 무언지 나도 그도 사실 아직까지 잘 모른다.

우리가 서로에게 진짜 운명인건지 조차 알 수 없다.


하지만 단 한 가지만은 알 수 있다.


그는 나를 반려로 맞이할만큼 사랑했고, 믿었다.

나는 그를 나의 동반자로 결정 할 만큼 사랑했고, 사랑했다.


그래, 그거면 된거다.


서로를 향한 마음.

힘들거나 아프거나 지치거나 고통스러워도 서로를 놓지 않을 마음.

사랑.


그 사랑을 아직 끝내지 못해 나는 

나를 속이고 기만했던 그를 다시금 믿고 싶어 도무지 놓지 못하고 있다.

일 잘하는 걸 보며 결혼해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낀 그런 놈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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