낳은김에 키웁니다 41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아빠는 신발공장을 다니셨고, 엄마는 섬유공장을 다니셨다.
아빠가 신발공장을 직접 운영하게 되시며 엄마도 함께 일하며 미싱일을 하셨다.
하지만 아빠와 엄마는 성향이 맞는 사람들이 아니고,
여자들에 둘러싸인 미싱일의 특성 상 청일점인 아빠는 늘 아줌마들의 꽃이었다.
그 꼴을 보기 힘들었던 엄마는 잦은 싸움을 핑계로 완벽히 아빠의 공장에서 나왔다.
쉬지 않고 둘이 벌어야 네 식구가 겨우 살아낼 수 있었던 탓에 두 분은 참 열심히셨다.
단지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자들의 열심히의 효율성이 그에 미치지 못하였을 뿐.
아빠의 공장에서 나온 엄마가 미용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엄마와 아빠의 수입이 역전되었다.
IMF와 사양산업의 직격탄을 고스란히 맞은 우리 아빠의 사업은 망하고 또 망했다.
그리고 아빠가 재기를 하지 못할 정도로 망해서 널부러져있는 동안
엄마는 동네 미용실을 하며 번 돈으로 아빠에게 온갖 건설장비 자격증을 따게했다.
그 덕에 우리 아빠는 대한민국에서 배 빼고는 다 운전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되었다.
-다만 아빠는 개버릇 남 못줘서인지 배운게 도둑질이라선지
일만 나가면 돈을 벌어오는 건설 장비 일을 시작도 안한 채 엄마의 돈으로 다시 신발공장을 차렸다.
사양 산업인 것은 마찬가지면서, 걸핏하면 일을 해준 본사가 망해서 돈 못 받으면서
40년이 넘도록 아빠는 신발을 잡고 놓지 못했다.
서론이 이렇게 긴 이유는 절대로 우리 집이 잘 살았다는 게 아니란 걸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다.
내가 어릴 때 탄산 음료는 아빠와 동생이 함께 일, 이주에 한번씩 목욕탕을 가는 날에만 먹을 수 있었다.
주 6일을 근무하는 엄마 아빠와의 여행은 시골집 다니러 가는 것이 다이고
그 흔한 극장에서의 영화관람, 그 대단한 사직구장도 나는 부모님과 함께 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집은 식사를 마치고 꼭꼭 제철 과일을 후식처럼 먹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엄마와 아빠가 과일을 좋아해서인지, 아니면 나와 동생이 잘 먹어서인지 모르겠다.
입이 짧았던 내가 밥 대신 과일로 배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 우리집에는 과일이 늘 있었다.
대단한 과일은 아니지만, 사과 배 복숭아 자두 감 귤 같은 과일이 언제나 있었다.
시골에서 온 것들도 있고, 시장에서 사다 놓은 것들도 있었다.
이사를 하느라 실습을 하느라 일을 하지 못해 내 수입이 한동안 거의 없다시피했다.
계절을 타는 상업 인테리어 일도 겨울엔 비수기라 남편의 수입도 줄었다.
돈을 버는 사람 둘이 제대로 벌지 못하니 자연스레 가정 경제가 어려워 졌다.
그래서 자연히 아이들이 방학이라 집에 있음에도 먹고 싶다하는 과일을 사줄 수가 없었다.
"비싸면 안먹으면 돼!"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부산에 계신 친정 엄마께서 제주도의 지인 농장에 부탁해
귤이 두 박스가 베란다에서 썩어가고 있음에도 손을 대지 않는 아이들은 지겹다며 다른 과일을 원했다.
겨울에 생일인 딸들의 생일상에 올릴 과일을 비싼 돈을 주고 샀다.
나는 삼신상을 10년간 차리는 사서 고생을 하는 중이다.
오랜만에 조우한 과일들에 아이들이 밥을 거부하고 과일을 게걸스레 먹었다.
그리고 사치같던 과일 소비는 겨우내 그날로 끝이었다.
날이 풀리고 남편이 새로운 공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계약금이 입금되자마자 아이들과 함께 농수산물시장 청과코너로 달려갔다.
샤인머스캣 1.7만원, 오렌지 12개 만원, 딸기 한 다라 만원, 블루베리 4팩 만원인데
애들이 줄줄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본 과일가게 아저씨께서 서비스로 2팩을 더 주셨다.
남편의 담배 한 보루 값으로 서너가지의 과일을 샀다.
과일을 사서 집으로 오는 그 짧은 동안 아이들은 블루베리 여섯 팩을 다 먹어치웠다.
수입과일이라 보존제와 농약이 있어 씻어서 먹어야한다는 내 만류도 그들의 식욕을 막을 수 없었다.
아주 큰 알을 찾으면 엄마나 아빠 입에도 넣어주고
셋이서 서로 경쟁하듯 크거나 작은 알을 찾아내며 즐거워했다.
"너네 먹는 거 보니 돈 없다고 그동안 과일 못사줘서 너무 미안하다.
엄마 어릴 땐 밥 먹고나면 후식으로 꼭 과일을 먹었는데."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을 한번도 내 부모에게 원망한 적도 없고,
내가 태어난 환경이 잘 사는 집이 아니라 주눅들거나 움츠러 든 적도 없던 나였다.
그런데 그렇게나 잘 망하고 없이 살던 내 부모보다
더 큰집, 더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며 자식도 더 많이 낳은 내가
정작 내 자식에게 내 부모가 했던 것 보다 더 잘해주기는 커녕
훨씬 더 못해준 것 같아 정말 만감이 교차했다.
조수석에 앉아 아이들의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면서도 짠한 내 마음이 슬퍼졌다.
그런데 내 말을 들고 둘째 예삐가 물었다.
"엄마 집 부자였어?"
"엥? 전혀 아닌데, 갑자기 왜 부자래?"
"밥 먹고 후식으로 과일을 매일 먹은 거면 부잣집인 거 아냐?"
"그러고보니 아빠도 밥 먹고 후식으로 과일이나 차 마시는 집은
재벌집이나 티비에서 나오는 잘 사는 집만 그런 줄 알았어."
과일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시댁식구들이어서
시부모님께선 당신 자식들을 키우는동안 과일을 안먹어 버릇했던 것 뿐이다.
설날 차례상에 올라간 과일도 우리집으로 다 보내실 정도로 두 분은 과일을 즐기지 않으신다.
남편과 아이들은 식후 과일을 챙겨 먹었다는 우리집이 부자라서 그런 거라 착각을 하는 듯 했다.
"아휴. 아니야. 지금도 부산이 물가가 훨씬 싸잖아. 그리고 또 옛날엔 과일이 지금보다 훨씬 더 쌌어."
오이 하나에 천원 이천원, 파 한단 삼사천원 하는 요즘 물가에 정말 장 보기가 겁난다.
내 주먹만한 작은 사과가 겨우 나와 비싼 값에 팔리는 것도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 있는 아카시아 나무의 수명이 다해 꿀벌의 먹이가 없어 꿀벌 개체수가 줄어들고,
날씨로 인해 수확량이 줄어든다는 환경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요즘 과일은 식후마다 즐기기엔 너무 비싼 아이템이 되었다.
어찌보면 수입과일이 더 싸게도 느껴지니까.
식후 과일을 맘껏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다시 돌아오면 좋겠다.
과일을 좋아하는 나나 내 아이들이 신나게 먹을 수 있을만큼.
지금 우리집 가정형편 상 식후 과일은 사치처럼 느껴진다.
"여보, 진짜 우리 열심히 더 벌어야겠어. 애들 먹는 것 감당하려면."
집으로 돌아온 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그래, 오늘 먹는 거 보니까 장난 아니긴 하더라. 저리 잘 먹는데 안 먹일 수도 없고."
"어, 나 애들한테 새삼 너무 미안하더라. 오빠 맥주 한 박스 담배 한보루 안사주고 애들 과일 사줄걸."
"야, 그렇다고 내가 술 담배 아니면 쓰는 건 뭐가 있냐.
밖에 나가 술을 먹길해. 집에서 맥주 한 캔인데. 나도 그 낙이라도 있어야지."
"그거도 그렇긴 해. 일단 내가 좀 더 줄일 수 있는 지출이 있나 보고 더 줄여볼게."
"지금도 솔직히 줄일 게 없을텐데.... 날 좀 풀렸으니 내가 좀 더 열심히 해볼게."
"응. 나도 개학하고 일을 좀 더 하면 지금 보다 낫겠지."
육아동지인 우리가 이런 현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아이들은 딸기와 포도와 오렌지를 한 상 차려두고 먹어댔다.
그리고 사온 모든 과일이 사라지기 까지는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았다.
가계부를 들여다보다가 매달 일정 금액을 과일값으로 따로 책정해서 사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대출, 보험, 연금, 교육비 등 매달 나가는 고정비 외에
탄력적으로 변하는 한달 생활비를 100만원으로 한정해두기로 했다.
마트 대신 시장가기, 인터넷 쇼핑 줄이기, 월급날에 하던 외식 없애기 등.
물론 경조사비도 있고 몇 달에 한번 주문하는 생필품 구입,
차 두 대의 유지비만해도 100만원보다는 더 쓰게 될 테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상한선을 두지 않으면 정말 써야할 곳을 놓치고 갈 것 같다.
지금은 대출에 허덕여서 투자도, 저축도 하지 못하는 하루살이이지만
오늘도 나는 나의 현실과 조금식 타협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 노력은 훗날, 조금 더 안정적인 소비 생활, 경제력으로 보상 받으리라 굳게 믿는다.
헛된 노력은 없을 테다.
돈돈 거리며 살았어도, 단 한번도 돈 없어서 내가 원하는 걸 안 해준 적 없던 내 부모와 달리
돈돈 거리면서 아이들에게 매번 참아라 하고싶은 걸 어찌 다 하냐, 다음에 하자며 미루는 못난 엄마이지만.
내 아이들 또한 절제와 포기와 양보를 배우는 기회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짠한 이 노력의 끝은 경제적 여유와 합리적 소비생활이라는 결실로 돌아오길.
꼭 이 엄마가 그렇게 만들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