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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좋은나 Apr 27. 2024

내일의 나에게 설거지 지옥을 미루다

식기세척기가 있어도 설거지는 언제나 하기 싫다.

5인가족이 밥 한 끼를 먹는데에만해도 

국그릇 다섯 개, 밥그릇 다섯개, 반찬 그릇 두세 개 그리고 수저 다섯 벌을 쓴다.

거기다 더해 찌개나 국을 끓이면 냄비가 추가, 

볶거나 조린 음식을 했으면 웍이나 후라이팬이 추가되고,

무침이라도 했다면 볼이 더해진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는 요즘 

다섯 식구가 하루 세끼를 모두 집에서 먹진 않지만

한 끼만 미루어도 사용한 식기류는 모든게 배가 되어 싱크대를 한 가득 채운다.





물론 우리집에는 식기세척기 이모님이 계신다.

3~4년 전 엄마집으로 이사가면서 구입한 식기세척기는 이제 없어서는 안될 삶의 동반자가 되었다.

쌓이는 식기의 속도나 양만큼 그것을 손쉽게 처리해주는 식세기 이모님의 존재감은 정말 엄청나다.


하지만 식세기 이모님을 가동시키는 데 까지 나의 내적 갈등이 크다. 

배가 부른 탓에 나온 게으름 때문이다.


음식이 묻은 식기를 애벌세척이라도 해서 식기세척기 안에 테트리스 하듯 쌓으려면 

손에 고무장갑을 끼고 그릇에 남은 음식물을 헹구고 찌꺼기를 모아야 하는 수고는 필수이다.


힘이 넘쳐 쌩쌩한 날에도 힘이 없어 골골한 날에도 

맛있고 행복한 식사에 동반되는 이 설거지 지옥은 언제나 엄마이자 아내인 나의 몫이다.

남편은 내가 입덧으로 설거지 한번 하며 토악질을 몇 번이나 해도 설거지만큼은 안해주던 사람이다.

Never, Ever 그의 사전에 설거지란 없다.


초등학교 고학년인 딸이 둘이 있으나, 전기밥솥에 쌀을 씻어 밥을 안치는 것 정도는 시키지만

설거지 만큼은 시키지 않는다.

그릇을 깰까 미덥지 못해서도 아니고, 음식찌꺼기를 만지게 하시 싫어 시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냥, 아직 나는 내 딸들에게 설거지 지옥을 보여 주고 싶지 않다.

설거지 지옥도 지옥이기에 나 혼자 버티는 것만으로 족하다.


나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아니 더 정확히는 주부가 되기 전까지 집안일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우리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남의집 애도 봐주고 살림도 해주며 살았고,

종가의 맏며느리로 시집을 와 차고 넘칠만큼 많은 집안일을 하셨다.

그래서 딸인 나는 엄마의 고단한 삶을 닮지 말라시며, 엄마 혼자 집안일을 다 감내하셨다.

어렸던 나는 그 때 그 의미를 몰랐다.

하지만 엄마가 된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아직은 내 딸들을 설거지지옥에 데려가고 싶지 않으니까.




저녁식사를 마쳤다.

남편은 식사에 술을 곁들였지만 나는 반주를 하지 않았다.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정신없이 아이들과 대화를 하고나니 힘이 없다.


설거지를 하는 게 매우 귀찮게 느껴졌다.

시간에 쫓겨 혼자 먹은 점심식사의 잔해와 더불어 

오후시간동안 물이나 커피를 마신 컵과 아이들이 하교 후 우유를 마신 컵도 있다.

저녁식사를 위한 반찬을 몇 가지 하느라 냄비, 웍, 체, 볼, 국자 등등등 싱크 가득 설거지가 쌓였다.

보기만 해도 질리는 양이다.


오늘 하루 나는 일도 했고, 반찬도 했고, 다른 집안 일도 다 잘 했다.

'설거지 지옥쯤이야 하루 건너 뛰어도 되지 않을까.'

그래, 그래도 돼지, 알될 거 뭐 있어.

(남편은 설거지를 해주지 않는 대신 설거지가 밀려도 별 말 하지 않는다.

해결하지 않으면서 입을 대는 걸 엄청나게 싫어하는 내가 버럭하기 때문이다.)


자기합리화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나가벼운 마음으로 내일의 나에게 설거지 지옥을 미루기로 했다.


유난히 피곤한 날, 빨리 잠자리에 들고 싶은 날이니까.

내일의 나를 위해 조금 이른 취침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


탁탁 손을 털고 미련없이 주방을 떠났다.

까맣게 불 꺼집 집안을 둘러보니 나도 이제 그만 자도 될 것 같다.


안녕 설거지!

내일 아침에 만나! 


내일의 나야, 설거지 지옥을 가뿐히 통과하도록 오늘의 내가 단잠을 선물할게.

마음은 솔직히 조금 불편하지만 설거지를 하지 않아 몸은 편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설거지지옥을 다녀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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