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춘프카 Jun 07. 2023

“선배 눈과 입이 튀어나올 것 같아요”

쪽팔렸던 그날…

큰일이다. 살면서 가장 쪽팔렸던 순간을 써야만 하는데, 잘 떠오르지 않는다. 잔잔한 쪽팔림(과 부끄러움)을 달고 살아온 나는 그 숱한 장면 중 '가장'에 적합한 기억을 뽑아내는 게 좀 어렵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쓴 시를 짝사랑하던 친구에게 건네주고 힘껏 차였던 순간이나 이등병 시절 신고식으로 불 꺼진 내무반에서 원더걸스에 '텔미'를 췄던 일, 처음 진행한 라디오 방송에서 대본대로 읽지 못하고 버벅거리다 NG를 10번 이상 냈던 당시... 그 외에도 많다.


고심 끝에 과거 이야기보다 최근에 겪은 '적당하게' 쪽팔렸던 순간을 풀어본다.  



그날도 점심을 거르고 몇 시간째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오전 현장 취재를 마치고 취재한 내용을 정리하느라 다른 여유가 없었다. 한참을 쓰고 있는데 그제야 내 옆에 수습기자 후배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도 배가 고팠을 것이다. 하지만 내 배고픔 따위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그시 후배를 쳐다봤다. 그랬더니 입안에서 뭔가 말은 하고 싶은데 참는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살짝 불길했지만 말해보라고 했다. 후배는 뜸 들이다 입을 뗐다. "선배... 기사 쓰실 때 말을 못 걸겠어요" 치열한 취재현장과 그것을 풀어내는 선배의 모습에 감동했다고 생각했다. 혼자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왜?라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예상밖이었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선배 눈과 입이 다 튀어나올 것 같거든요." 그제야 고갤 들어 내 모습을 살펴봤다. 흉했다. 몹시, 흉했다. 충혈된 양쪽 두 눈과 초췌한 몰골 그리고 후배가 말한 대로 내 눈과 입은 평소보다 더 돌출돼 있었다. 집중하면 유독 강력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음 같아선 두 손으로 밀어 넣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후배는 그런 나를 보며 "그만큼 집중하시는 모습이 멋지다는 말"이었다고 위로했다. 미안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요즘 MZ세대의 솔직함을 제대로 맛봤다.  그날 기사를 마저 쓰고 저녁 첫끼로 삼겹살과 소주 조합으로 조촐한 회식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덕분에 배고픔도 사라졌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긴 침묵이 이어졌다. 후배는 "선배 A형이신가요? MBTI는 혹시 'I'로 시작하시는지..."라고 물었다. 더 까불기 전에 집으로 돌려보냈다. (둘은 무척 가까운 사이고 지금도 정상적인 연락을 취하는 점을 밝혀둡니다. 오해 없으시길.) 


후배를 내려주고 혼자 중얼됐다. "나는 B형에 ENTJ거든" 그 순간 이렇게 소소한 쪽팔림에 얼굴을 붉히는 나는 정말 그 핏줄과 정체성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데 또 혼자 벌게졌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은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까롤 담아 갑니다. 이번달 주제는 '살면서 가장 쪽팔렸던 순간'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의 숨은 이야기, 왜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는 것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