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
탁구장 문을 열고 쭈뼛쭈뼛 들어서는 한 여자가 있다. 베이지색 롱 카디건에 등산복으로 추정되는 검정 바지에 핑크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스카프를 두른 그녀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를 검정 에코백을 들고 어정쩡하게 서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린다. 난감해진 얼굴의 그녀는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듯하다. 드디어 한 사람이 “하늘 씨, 여기야, 이리로 오면 돼.”라고 부르자 쏜살같이 그녀에게로 향한다. 위기를 모면한 듯한 그녀의 얼굴엔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다. 탁구장이라는 낯선 세계에 발을 내 디던 그날.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내게는 탁구장 문을 열고 들어선 그날이 아직도 하나의 장면처럼 생생하다.
1년 가까이 집 앞 여성센터에서 주 2회, 회당 7분 정도 레슨 받았다. 함께 배우던 언니가 “탁구를 이왕 배울 거라면 제대로 한 번 배워 봐야겠어.”라며 사설 탁구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 불통은 내게도 튀었다. “센터에 비해 레슨 시간도 길고 오전 주부반이라 비용도 저렴해. 탁구 로봇도 있어 얼마나 연습하기 좋다고”라며 탁구장으로 와서 함께 치자고 한참을 권유했다. 운동이라곤 일평생 탁구가 처음이고 넘어지면 코 닿을 곳인 센터를 놔두고 '굳이 탁구장까지 가서 배워야 하나?'라는 생각과 '탁구장에 한 번 가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잖아?'라는 생각이 충돌했다. 결국 후자를 택해 탁구장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나를 관장님과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는 테이블로 데려갔다. 빨간색, 파란색, 핑크색, 노란색 등 형형색색의 유니폼 상의와 반바지를 입은 그들 앞에 선 나는 마치 이방인 것 같았다. 그녀는 아주 능숙하게 이 세계의 규칙이라도 되는 듯 나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나는 선생님 말씀이 끝나길 기다리는 전학생처럼 다소곳이 손을 모은 채 그녀 옆에 섰다. “여성센터에서 함께 탁구 치던 동생이에요. 탁구 친 지 일 년 되었고 나이는 마흔여섯이랍니다.” 소개가 끝나자마자 나도 모르게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꾸벅 인사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레슨 받으실 거죠?”라는 관장님의 자연스러운 물음에 안 받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그만 “네”라고 말해버렸다. 한 번 와보고 결정한다더니 생각할 틈도 없이 ‘휘리릭’ 빠르게 진행되는 전개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워워. 정신 차려.’ 주문을 건 뒤 한차례 숨을 가다듬고 나서야 구장 안을 제대로 둘러볼 수 있었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탁구장이구만! 마침 레슨실에서는 한 회원이 레슨을 받기 시작한다. 관장님의 주문대로 레슨 받는 회원이 움직이는데 1년 동안 포핸드와 백핸드만 배웠기 때문에 눈은 뚫어져라 보고 있지만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레슨실 옆 탁구 로봇이 있는 탁구대에서는 한 회원이 로봇이 주는 공에 맞춰 포핸드 연습을 하고 있다. 탁구 로봇이란 걸 난생처음 봤기에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연습할 탁구 로봇이 있다니 그야말로 신세계구만!’라는 감탄도 잠시 네 대의 탁구대가 있는 탁구대에 눈을 돌린다. 포핸드를 배우긴 했어도 제대로 된 포핸드 랠리 즉 랠리가 열 개 이상 왔다 갔다 한 적이 없었기에 탁구대에서 길게 이어지는 랠리만 봐도 ‘대단한데? 와! 정말 잘 친다.’라는 감탄과 함께 ‘나도 저렇게 치고 싶다.’라는 열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한참 탁구장 구경에 얼이 빠져 있을 무렵, 언니가 나를 부른다. “하늘 씨, 탁구장 왔으니까 탁구 한 번 쳐봐야 하지 않겠어? 빨리 나와.” “오늘요?” “그럼 언제? 빨리 와.” 탁구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녀에게 거절할 명분은 없다. 사실 오늘은 구경만 하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낯선 곳을 소화할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 준 사람에게는 도리가 아니기에 그녀의 뜻을 따라야 한다. 그제야 여태껏 입고 있던 카디건을 어색한 몸짓으로 벗고 센터에서 늘 입고 치던 등산복 상의와 등산복 바지 차림으로 검정 에코백에 들어 있던 탁구 라켓을 주섬주섬 꺼내 그녀에게로 향한다. 탁구화도 아닌 운동화를 신고 주위의 시선에 어쩔 줄 몰라하며 엉거주춤 탁구대를 향해 걸어 나간다. 탁구대까지의 거리가 한없이 멀게만 느껴진다. '아이고 왜 이리 머냐고?'
짧은 목례 인사를 하고 포핸드 랠리를 시작한다. ‘얼마나 치나? ‘어떻게 치나?’ 등 뒤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하고 랠리를 잘해보려고 눈을 부릅뜨고 공에 집중한다.
그러나 낯설어서 그런지 긴장했는지 마음처럼 되질 않는다. ‘센터에서 랠리 할 때는 그래도 이것보단 잘했는데.’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지만 이렇다 할 변화는 없다.
실수를 해 공을 주우러 갈 때마다 주위 사람들을 표 나지 않게 힐끔힐끔 쳐다본다. 다들 탁구 치느라 정신없어 내겐 관심도 없는데 다 나만 쳐다보는 것만 같다. 탁구장에서의 첫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탁구장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게 어떤 의미인지. 탁구가 내 일상을 얼마나 쥐락펴락 할지. 그런 사실은 까맣게도 모른 채 해맑게 탁구장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새로운 세계의 문은 그렇게 예고 없이 열리나 보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날에.
그래서 인생이라는 게 오묘한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