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의 말들) 발터 벤야민 『고독의 이야기들』
“솔직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짧게 뚝뚝 끊어지는 글들은 통일된 서사도 없고 메시지가 뚜렷하지도 않네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수두룩하고 해석도 되지 않고요. 그런데 놀라운 건 이런 혼돈 속에서도 뭘 흔드는지 모르겠지만 제 안의 뭔가를 자꾸 흔든다는 겁니다. 정체를 모르겠는데 재미있어요. 해석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데 왜 재미있을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을 읽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이런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질문을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하네요.”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수많은 작가들이 그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는지 궁금했지만 엄두를 내지 못했던 그의 책을 한 달에 한 번 있는 줌 독서 토론에서 드디어 만났다. 읽기가 기본값인 독서 토론 강사님들이 대다수인데도 그의 글이 주는 낯섦의 정도는 다들 감당하기 어려웠나 보다. 이구동성으로 작가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탄식이 쏟아졌다. “무력감을 느꼈다.”에서부터부터 “사유의 대향연이다.” 까지 반응도 극과 극으로 갈렸다. 그럼에도 각자 인상적인 구절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든 해석해 보려 하고,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는 안간힘으로 똘똘 뭉친 시간이었다. 말을 하는 사람도 이게 맞는 해석인지 의심했고, 듣는 사람도 저게 맞는 말일까, 갸우뚱하는 시간이었다. 함께 헤매고 또 헤매었다.
그런데 해석하면 해석할수록 점점 그의 글에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해석해서 우리가 가진 틀 안에 넣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그의 글을 읽는 데 방해가 되는 것 같았다. 꿈과 몽상을 넘나들며 의식의 흐름과 사유의 흐름으로 쓰인 그의 글은 이렇듯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읽기 방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뚜렷하게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한 문장들. 오히려 한 선생님의 말에 답이 있는 듯했다. “욕심 버리고 읽었어요. 너무 아름다운 책입니다.”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을 내려놓아야만 하는 책, 아니 저절로 해석을 포기하게 만드는 책. 그가 의도한 것이 그것이었을까?
토론 책은 물론이고 혼자 찾아 읽는 책까지 모조리 필사를 해야만 온전히 읽은 것 같은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나. 필사에서 그치지 않고 필사한 문장들 중 한두 개를 골라 일상에 녹이는 글을 써야만 책 읽기가 비로소 끝난다고 생각하는 요즘의 내게 그의 글은 글 자체가 질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어디 한 번 내 글을 필사하고, 필사한 문장을 가지고 글을 써 봐. 과연 네가 하던 방식으로 내 글이 받아들여지는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필사를 하고, 일상에 녹이고 싶은 문장 하나를 찾았다. “밤중에 어둠 속에서 깼을 때, 나에게 세상은 말없이 던져진 단 하나의 질문일 뿐이었다.”(p.85) 토론에서도 이 문장을 인상적인 구절로 뽑은 후, “그의 말처럼 말없이 던져진 질문이 세상이기에 우리가 이렇게 늦은 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조금이라도 찾기 위해 모여 있는 것 아닐까요?”라는 말로 어떻게든 지금 나의 일상과 연결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게 다였다. 더 이상 확장되지 않았다.
그가 의도한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단지 밤중에 어둠 속에서 깼을 때 그런 감각이 느껴진다는 걸 알려주고 그 자리에 나를 데리고 가 “내가 느낀 감각을 너도 한 번 느껴 봐.”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저 해석하지 않고 자신이 데려가는 사유의 지점에서 함께 감각하길 원하지 않았을까? 그의 사유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분명 내 안의 뭔가가 일렁이고 흔들리는데 가끔씩 고개를 쳐들어 해석하려는 관성이 그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 같았다.
이렇듯 상투적이라고 느낄 만한 것들이 없고, 뻔하지 않은 그의 글은 나의 책 읽는 방식에 균열을 일으켰다. 책을 읽은 것뿐인데 너무 낯설어 먼 여행을 다녀온 느낌이다.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읽히지 않는 책. 틀에 가두려 하면 할수록 멀리 달아나는 책. 그저 그의 사유의 흐름에 온 몸을 맡기고 그가 쓴 문장에 오래오래 머물러야만 사유의 바다에 풍덩 빠질 수 있는 책. 그의 글이 어렵다고 투덜투덜 대면서도 읽는 내내 평소와는 전혀 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어서 재미있었던 것 아닐까? 읽는 순간에 느끼는 낯선 감각만으로도 충분한 독서의 이유가 되는 책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20년 가까이 편집자 생활을 한 강윤정 님이 자신의 유튜브 채널(편집자 K)에서 이제는 책 읽기가 일상의 일부가 되어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기록하지 않아서 제가 읽은 책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 것도 굉장히 많은데, 그것이 제게 크게 불편함을 주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냥 책을 읽는 그 순간 내가 느끼는 것, 혹은 생각하는 것, 그 순간만이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처럼 읽는 순간만이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이 책을 읽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책이 내게 이런 의미를 줬어’라는 의미부여에 한없이 꽂혀 있는 사람이고, 읽은 책을 필사하고 필사한 문장을 다시 일상에 녹이는 글을 쓰는 즐거움으로 사는 사람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그녀처럼 읽는 순간에 느끼는 감정만으로도 충분해 필사라는 기록을 하지 않아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분명 올 것이다. 그런 순간이 오면 벤야민의 글에 더 가까워질 수 있으려나?